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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芙蓉樓送辛漸(부용루송신점)

금삿갓의 漢詩工夫(241217)

by 금삿갓

芙蓉樓送辛漸(부용루송신점) / 부용루에서 신점을 전송하며

- 王昌齡(왕창령)

寒雨連江夜入吳

한우연강야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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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비 이어지는 강으로 오(吳) 땅에 밤에 와서


平明送客楚山孤

평명송객초산고

○○●●●○◎

아침에 벗을 보내니 초산(楚山)도 외롭구나.


洛陽親友如相問

낙양친우여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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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의 친구들 서로 안부 묻거든


一片氷心在玉壺

일편빙심재옥호

●●○○●●◎

한 조각 맑은 마음 옥병에 있다 하게.

* 芙蓉樓(부용루) : 장쑤성(江蘇省) 진강(鎭江)에 있는 누각으로 원래 서북루(西北樓)였는데, 당대(唐代)에 진왕(晉王) 이공(李恭)이 윤주(潤州 : 지금의 강소성 진강시) 자사(刺史)가 되었을 때, 부용루로 개명하였다.

* 辛漸(신점) : 왕창령이 지금의 남경시(南京市)인 강녕현(江寧縣) 현승(縣丞)으로 재임할 때 시를 주고받은 시우(詩友)이다.

* 寒雨(한우) :가을 겨울의 차가운 비.

* 吳(오) : 윤주(潤州) 일대인데, 이 지역은 예전에 오(吳) 나라에 속했다. 여기서는 부용루의 소재지인 장쑤 성 진강을 지칭한다.

* 平明(평명) : 하늘이 막 밝아지는 때, 즉 새벽녘을 일컫는다. 날 샐 무렵이다.

* 楚山(초산) : 진강(鎭江) 일대의 산을 지칭한다. 이 지역은 원래 오(吳) 나라 땅이었으나, 후에 오나라가 월(越) 나라에 망하였고, 월나라는 또 초(楚) 나라에 망하였다. 여기서는 오(吳) 나라와 초(楚) 나라가 차지했던 진강 일대를 가리킨다.

* 氷心(빙심) : 마음을 얼음에 빗대어 마음의 깨끗함과 공명정대함, 얼음처럼 맑고 깨끗한 마음을 말한다.

* 玉壺(옥호) : 옥항아리. 옥으로 만든 병이다.

芙蓉樓(부용루)는 在鎭江府城西北隅(재진강부성서북우)라. 時以被譎入吳(시이피휼입오)로 冒雨夜行而連江皆雨色也(모우야행이연강개우색야)라. 平明(평명)은 夜行之明日(야행지명일)이요. 送客(송객)은 送辛漸入洛(송신점입락)이라. 楚山孤(초산고)는 樓頭所見(루둥소견)이 大江之北(대강지북)은 皆楚地(개초지)라. 辛漸(신점)이 曉行(효행) 하야. 赴洛(부락)할새. 依山而行(의산이행)이요. 楚山孤(초산고)는 賦其所見也(부기소견야)라.

부용루는 진강부 성 서편 모퉁이에 있다. 이때에 속임수를 당하여 오나라에 들어가 비를 무릅쓰고 밤에 갈 적에 강을 따라 모두 비 오는 풍경이었다. 平明(평명 : 아침)은 밤길을 가는 중 밝아오는 날이요. 送客(송객)은 신점이 낙양에 들어가는 것을 전송한 것이다. 楚山孤(초산고 : 초산이 외롭다)는 부용루 머리에서 본 것이 큰 강의 북쪽은 모두 초나라 땅이었다. 신점이 새벽에 출발하여 낙양으로 갈 적에 산에 의지하여 간 것이므로 楚山孤(초산고)라고 그가 본 대로 읊은 것이다.

如相問(여상문)은 辛漸(신점)이 至洛(지락)하야. 倘有親友以我之行藏(당유친우이아지행장)으로 問(문)이라. 在玉壺(재빙호)는 此爲辛漸答親友之語(차위신점답친우지어)라. 說我宦情(설아환정)이. 已冷(이랭)하야. 如一片氷(여일편빙)을 貯之玉壺(저지옥호)하야. 日就淸冷而相得也(일취청랭이상득야)라.

如相問(여상문)은 신점이 낙양에 도착하여, 혹시 어떤 친구가 나의 행장을 묻는 것이다. 在玉壺(재빙호)는 이때 신점을 위하여 친구의 말로 답 한 것이다. 나의 벼슬하는 사정이 이미 썰렁하여 마치 한 조각 얼음이 옥호에 저장해 둔 것과 같아서 날로 청랭함을 이루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 왕창령(王昌齡, 698년 ∼ 756년) : 당(唐) 나라 경조(京兆) 장안[長安, 지금의 산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 사람이다. 자(字)가 소백(少伯)이다. 현종(玄宗) 개원(開元) 15년(727)에 진사(進士)에 급제해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에 제수되었다가, 개원 22년(734)에 박학굉사과(博學宏辭科)에 합격해 사수위(汜水尉, 사수는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싱양시(滎陽市) 서북쪽]에 제수되었다. 개원 25년(737)에 죄를 얻어 영남(嶺南)으로 폄적되었다가 사면되어 개원 28년(740)에 장안(長安)으로 돌아왔으며, 이듬해 강녕승[江寧丞, 강녕은 지금의 장쑤성(江蘇省) 난징시(南京市)]으로 임명되었다. 천보(天寶) 6년(747)에 다시 죄를 얻어 용표위[龍標尉, 용표는 지금의 후난성(湖南省) 화이화 지구(懷化地區)]로 좌천되었으며, 천보 14년(755)에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자 난을 피해 장강(長江)과 회수(淮水) 일대에 머물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호주자사(濠州刺史) 여구효(閭丘曉)에게 피살되었다. 왕지환(王之渙), 고적(高適), 잠삼(岑參), 왕유(王維), 이백(李白) 등과 교유했으며 개원(開元)·천보(天寶) 연간에 시로 명성이 높았다. ‘변새(邊塞)’, ‘궁원(宮怨)’, ‘규원(閨怨)’, ‘송별(送別)’을 노래한 작품들의 성취가 매우 높으며, 특히 칠언절구(七言絶句)에 뛰어나 후인들에게 ‘칠절성수(七絶聖手)’라고 불린다. 저서로 ≪왕창령집(王昌齡集)≫ 4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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