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고 소소했던 순간들이 시간이 지나 특별하고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최근 ‘응답하라 1988’을 참 재미지게 봤다. 뭔가 매끄럽지 못한 결말이 아쉬움을 주었지만, 요즘엔 느끼기 힘든 친구 간의 우정, 가족 간의 사랑 그리고 이웃 간의 애틋함에 대한 향수에 점취돼, 내 맘속의 눈물, 콧물, 웃음을 쏙 빼앗아 갔던 작품으로 기억된다.
1988년 세대인 큰형(당시 17살)은 드라마가 하나도 재미없다며, 사람들이 왜 재미있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투덜 됐다. 하지만 정작 7살 꼬마였던 내게, 드라마의 공간적 배경과 상황들은 세대 이상의 커다란 공감을 자극했었다. 당시 나에겐 ‘넓게만 보였던 좁은 골목길’과 ‘어릴 적 함께 뛰놀던 다정한 옛 친구들’이 있었다. 드라마 속 쌍문동 5인방처럼.
얼마 전 '윤영'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재생'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윤영이, 재생이, 재철이, 근용인 내 불알친구들이다. 송파구 풍납1동 21통 1반 골목길(우리는 크리스탈제과 골목이라 부른다)의 추억을 함께 공유했던 친구들이다. 난 그곳에서 7살 때부터 16살까지 10년을 살았고, 그들은 내 삶의 커다란 부분이었다. 딱지치기, 구슬치기, 비석치기, 땅따먹기, 깡통차기, 1234, 다방구, 와리가리 등 매일매일이 재미난 일의 연속이었다. ‘피구왕 통키’가 할 때는 피구를 ‘축구왕 슛돌이’가 할 때면 같이 축구를 함께했다. 난 그 녀석들과 매일 함께했다. 풍납1동 21통 1반의 ‘넓은 골목길’에서.. 저녁밥때가 되면 2살 차이인 작은 누나는 뻐꾸기 시계처럼 항상 - “정택이 들어와”- 소리쳤고, 그때가 우리가 헤어질 시간이자 하루 중 가장 불행한 때였다.
중학생이 되면서 우리는 내기를 좋아했고 사소한 것에 내기를 걸었다. 부루마블을 할 때도 한판에 천 원씩, 심지어 ‘햄버거세트 3개를 한 번에 먹을 수 있다 없다’를 가지고 핏대를 세우면 내기를 하기도 했다. 중3 때 우리는 고스톱, 섯다, 포커, 월남뽕 따위를 했다. 꾀나 조직적으로 했던 기억이다. 방과 후 이철희라는 친구 집에 모여 판을 벌이는 게 일상이었다. 우리는 ‘철부지’였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난 친구들과 다른 관심사가 생기면서 만남이 줄었고, 2학년이 되면서 크리스탈제과 골목을 떠난다. 그렇게 친구들과 멀어져 갔다. 이후 나의 20대와 30대 초반 그 녀석들과의 추억은 거의 없다.
몇 달 전 친구와 아주 작고 약간은 외진 곳에서 소주 한잔을 하고 있었다. 저녁이 채 되지 않았지만 낮부터 들이켜 거나한 상태였다. “정택아” 누군가 뒤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돌아보니 그 녀석이었다. “윤영아” 너무나 반가웠다. 나의 골목길 친구.. 믿기지 않았다. 순간 영화 ‘친구’에서 준석과 상택이가 우연히 만나는 장면이 떠올랐다. 거의 13년 만의 우연한 만남이었다. 우린 질긴 인연이었다.
윤영이와 재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정택아, 재생이 아버지 돌아가셨다.” 정말 오랜만에 받은 연락이지만, 좋지 않은 소식이라 적잖이 당황했었다. 우린 함께 장례식장에 갔다.
재생인 생각보다 담담한 표정이었다. 나랑 햄버거 세트 먹기 내기를 하던, 2남 2녀 중 막내, 우리들 중 유독 철없던 날라리였는데..
“정택아 나 이제 고아다.”
“이제 좀 효도하려고 했는데.. 기회도 없네..”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걸 겨우 참아냈다. 그 어떤 위로의 말도 위로를 대신할 수 없기에 아무 말도 해 줄 수 없었다. 가장 큰 위로는 공감이라던데.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 내겐 녀석의 깊은 슬픔을 덜어줄 재간이 없었다.
10여 년 사이에 친구는 어머니를 보내고, 아내를 맞이했고 어여쁜 딸을 갖게 되었고, 이제는 아버지 마저 배웅하게 되었다. 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일들은 철부지 내 친구를 어른으로 만들었다. 한껏 철든 친구가 대견하기도 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에 가슴이 아렸다.
이렇게 18년 만에 친구들 모두를 한 자리에서 만났다. 신기하게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마치 어제까지 같이 놀던 그런 느낌이었다. 풍납1동 21통 1반 골목의 그 녀석들이었다. 틀림없었다.
오늘은 잊고 지내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네
...
어릴 적 함께 뛰놀던
.....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
어릴 적 넓게만 보이던 좁은 골목길에
다정한 옛 친구
...
<응답하라 1988 OST 쌍문동 중에서>
- 옛 친구들과 뛰놀던 넓은 골목길을 추억하며 -
그날, 우리는 더 이상 철부지가 아니었지만, 그 골목길의 추억은 여전히 우리를 어린아이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 사소했던 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위로하는 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