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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두열매 Oct 22. 2024

세상의 모든 공기

1) 공기 2) 공기 3) 공기

@father7576 열매 그림일기

한 달에 3번 그림책 모임이 있다.

각자 진행하고 있는 더미북과  출판사와 계약한 그림 채색을 보여주기도 하고, 출판사에서 받은 피드백에 대한 의견도 주고받으며 작업하다 막힌 부분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

이런 시간을 함께 하며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3년이 훌쩍 넘어가는 시간을  보내야 그림책이 완성된다. 함께  아이디어를 나누는 시간도 필요하지만 혼자서 꽁꽁 싸매고 작업을

해야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나에게도  4년째 낑낑거리고 있는 더미가 있다.


그날은 을지로에서  모임이 있었다. 을지로 3가인지 을지로 인지 매번 가는데도 헷갈려 한 정거장을  지나쳐 잘못 내렸고 곧바로 둘째 담임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아침에 속도 안 좋고 머리도 아프다고 해서 보건실에 보냈는데, 보건 선생님이 쉬는 게 나을 것 같다 하시네요 조퇴를 시켜도 될까요?"

아침에 너무 춥다고  몸을 잔뜩 구부린 체 식탁에 않아 사과 한쪽과 계란프라이 반쪽을 먹고 갔는데

탈이 난 것 같았. "네~선생님 집으로 보내주세요" 나는 대답하고 다시 개찰구로 들어가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 어디야? 나 집에 왔어"  금방 전화가 왔다. "엄마도 금방 가니까, 침대에 따뜻하게 누워있어"

지하철을 타고  오며 보니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생각해 보니 집에 밥이  없었다.

집 근처 역에 내려  새로 생긴 김밥집으로 갔다. 키오스크 주문이었고 김밥종류가 58가지가 넘었다.

기본김밥과 딸이 좋아하는 참치김밥을  포장해 부랴 부랴 집으로 돌아가 보니 다행히 딸은 좀 괜찮아진 듯했다.

"엄마가 너 좋아하는 참치 김밥 사 왔어, 먹고 병원 가자"  나는 식탁에 김밥을 내려놓았다.

"엄마!  참치 김밥은 없는데, 참치가 아니라 김치야 김치"

 나는 그럴 리 없다며  김밥에 붙은 스티거와 영수증까지 확인했는데 선명하게 '김치김밥'이라고 찍혀  있었다. 어쩜  58가지 김밥에 정신이 팔려 앞글자는 잘 못 보고 '치'글자만 보고 주문했나 보다.

사실 키오스크 주문을 하며 약간 빨간 것이 사진 속에 보였는데 나는 당근인가 하고 무심코 넘겼다.

딸과 참치, 김치 치치치치 말장난을 하며 깔깔깔 웃고 김밥을 먹는데  나의 초등시절이 떠올랐다.


오전 오후반이 있었던 시절, 머릿니 검사를 하던 시절, 교실 바닥을 윤이 나게 닦았던 시절.

그 시절 선생님이 수업을 마치며  "내일은 집에서 공기를 가지고 와라"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때 할머니랑 같이 살았고  할머니는 나에게 작은 스텐밥공기를 챙겨  주셨다.

다음날  수업시간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선생님은 "자, 공기 가지고 교실 뒤로 나와라" 하셨다.

모두 작은 다섯 알 공기를 가지고 나와 공기놀이를 하는 것이었다.

이런! 나의 가방 속에 있는 것은 반짝반짝 빛나는 스텐 밥공기가 아닌가~

그때 나는 부끄럼이나  난처함보다는 그 공기를 밥공기로 생각한 내가 웃겼다.

그 시절 유난히 밥을 많이 먹고 먹는 걸 좋아라 했지만 어떻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밥공기를 가져갔을까! 나의 단순함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어리숙하고 덜렁거리고 실수가  많은 것은 별 반 달라지지 않았다.

한 번에 끝낼 일은 두서너 번 하기도 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지만 그래서 알 수 있다.


부족하다는 것

실수한다는 것

어리숙하고 무지하다는 것

아니까 이해할 수 있고 아니까 기다릴 수 있고 아니까 안아줄 수 있다.

가끔 화가 날 때도 있지만 말이다.


저녁밥을 먹고 오랜만에 두 딸과 공기놀이를 했다.

나의 무용담을 들은 첫째 딸은 "엄마 그건 주의력 부족이야"라며  얄밉게  꺾기신공을 선보였고

둘째 딸은 오늘바보공기로 함께 했다.





토닥 한 줄

비인류의 세계에도 풍물은 있고
의외로 다들 변함이 없군요

                                                      -황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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