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사무관으로서 사업, 법, 기획, 행사 등 다양한 업무를 해봤지만, 비서실에 소속되어 비서관으로 일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처음 그 자리로 발령받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믿기지 않았습니다. 제가 가는 자리가 내근 비서관 자리로, 일정 관리나 의전도 당연히 잘해야 하는 자리였거든요. 일만 할 줄 알지, 윗사람 모시는 데는 굉장히 약한 저였기에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많이 되었습니다.
처음엔 새로운 비서관으로 제가 유력하단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와이프에게 그 사실을 알리면서 만약 그 자리에 가게 되면 앞으로 최소 1년은 주말에 어디 놀러 갈 시간도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와이프는 당장 어디든 가야겠다며 갑자기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표를 끊었습니다. 그렇게 ENFP 두 명은 금요일 퇴근하자마자 청주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갔습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제주도에 간 것 치고는 알찬 시간을 보냈습니다. 매 끼니 맛집을 찾아다녔고, 신화 테마파크에서 놀이기구도 탔죠. 돌아오는 비행기 편을 못 구해서 와이프는 청주로, 저는 김포로 각각 다른 비행기를 타고 왔다는 게 딱 한 가지 흠이랄까.
그다음 주에 인사계장에게 제가 비서실로 가는 게 확정되었단 이야기를 듣고는 주말에 고향에 부모님을 뵈러 갔습니다. 원래도 자주 가는 편은 아니지만 앞으로 더 뵙기 어려워질 것 같아서였죠. 간 김에 아웃렛에서 정장도 한벌 맞추고 와이셔츠와 구두도 샀습니다. 평소엔 면티, 면바지 차림에 운동화를 신었던 사람이라 입을 옷이 없었거든요. 자리 좀 바뀐다고 정장까지 산다는 게 남들에겐 되게 유난 떠는 것 같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정말 당장 입을 옷이 결혼식 예복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정장 차림으로 회사에 출근했더니 세상에, 저를 본 사람들이 다들 한 마디씩 하더군요. 이렇게 입을 수 있었는데 왜 캐주얼하게 다녔냐, 멀리서 보니깐 누군지 못 알아보겠더라, 비서실로 간다더니 사람이 달라졌다 뭐 이런 이야기들이었습니다. 특히 예전에 라운드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고 복장을 지적했었던 국장님께서는 저를 보시더니 감동한 눈빛으로 등을 토닥여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옷 잘 어울린다면서요. 저는 적응이 좀 되면 다시 캐주얼을 도전해 보겠다는 농담을 했지만, 이 자리에 있는 동안엔 사실 어렵겠죠.
그다음으로 한 일은 지자체 10군데에 전화를 돌리는 거였습니다. 길게는 몇 달 동안 저의 검토 의견을 기다렸던 지자체 공무원들께 "제가 갑자기 인사발령이 나서 약속했던 날에 회신을 못 드리게 되었다고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전화하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다행히 다들 이해해 주시더라고요.
몇몇 분은 어디로 옮기게 되었냐 물으시길래 비서실로 가게 되었다니깐 곧 승진하는 것 아니냐며 축하해 주셨습니다. 사실 그 자리는 일이 많아서 고생하고 그 고생하는 만큼 역량이 쌓이는 자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승진이 보장되는 자리는 아니거든요. 생각하시는 그런 자리 아니라고 구구절절 설명드리기가 그래서 그냥 감사하다고 하고 넘어갔습니다. 어쨌든 저는 끝까지 책임지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었는데, 그분들은 화를 내시긴커녕 축하까지 해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