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킹오황 May 29. 2023

보좌하는 사람입니다

비서관으로서 제가 하는 업무에는 의전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의전은 부수적인 업무고요. 오히려 제 주요 업무는 각 국에서 올라오는 보고 자료를 검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면 보고서에 연필로 살짝 표시를 해두는 것이죠. 저희는 그걸 가필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부처의 비서관들이 그런 업무를 하는 건 아닙니다. 저희 부처의 특수성이 큰 편이어서 그렇습니다.


처음 그 자리에 발령받았을 때는 과연 제가 국장님들까지 보신 내용에다 가필을 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가필을 안 해도 문제, 해도 문제가 될 수 있었거든요. 제가 보기에 완벽해 보여서 아무 내용도 적지 않았던 것인데 마치 검토를 제대로 안 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고, 그렇다고 뭐라도 적었더니 그게 제가 잘못 알았던 것이었다면 그것 또한 검토를 제대로 안 한 것이 되니깐요.


결국, 아주 자세히 검토해서 누가 뭐라 하더라도 확신이 드는 것만 적어야 했는데 이게 참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꼼꼼히 살펴보는 것은 제 특기였기 때문에 풀 초근을 찍으며 어떻게든 문제점을 찾아내 가필을 적으려고 했습니다. 상사는 그렇게 적어 낸 가필 중 어떤 것은 지우개로 지우시기도 하고, 어떤 건 동그라미를 치고 담당 부서에다 다시 검토하라는 지시를 하시기도 했고요. 제 의견이 받아지기도 하는 걸 보면서 저는 점점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상사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말씀하시더군요.


"이 자리에 온 지 두 달쯤 됐지? 이제 적응도 되었을 테니 하는 말인데 비서관의 역할을 다시 잘 생각해 봐라. 깊이 검토해서 니 의견을 적는 것도 좋은데, 어떻게 하면 내 시간을 아낄 수 있을지를 먼저 고민해 봐라."


(예전에 기재부 과장님께서 우리가 보고서를 쓰는 이유는 시간이 부족한 간부들이 빠르고 정확하게 의사결정을 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함이라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더군요)


그 말씀의 의미도 그러했습니다. 제가 자료에서 이상하거나 잘못된 것을 찾아서 그걸 체크하고 알려주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단 상사가 두꺼운 보고 자료를 빠르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보좌하는 것이 더 중요한 저의 역할이란 것이었죠. 전 나름 제가 하는 방식이 맞았다고 자만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크게 한방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너무 제 자신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 후부터는 어떻게 해야 상사의 시간을 아낄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담당 부서에서 놓친 비슷한 사례나 관련된 자료를 찾아 인쇄해서 함께 드리고, 자료의 핵심 내용을 요약-정리해서 가필로 적어놓으며, 상사가 보완 지시한 사항을 정확히 담당자에게 전달해서 한 번에 결재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은 서투르고 부족한 면이 많습니다. 그래도 이거 하나는 이제 배웠습니다. 여기는 제가 잘한다는 걸 증명하는 자리가 아니라, 제가 모시는 분의 시간을 아낄 수 있도록 하는 자리라는 것을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