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퇴근길을 터벅터벅 걷다 조촐한 옷차림새와 두꺼운 뿔테 안경, 책을 안고 지나가는 어느 이름 모르는 학생을 보았다. 직장인들만 보는 것에 익숙해진 나의 편협한 시선에 과거의 재수생 시절이었던 내 모습이 선명해지는 순간이었다. 거리 한복판에서 멈춰 서서 뒤돌아 다시 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당찬 걸음이지만 어딘가 조금 쫓기는 듯한 불안함이 발꿈치의 끝자락에 그림자 마냥 따라붙었다. 그가 코너를 돌아 이내 발꿈치의 그림자도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다시 가던 길을 향해 걸었다.
그가 꽉 끌어안던 두 팔과 당찬 걸음에서 조금은 불안했지만 든든한 믿음이 어른거렸고, 이윽고 나 자신으로 오버랩되었다. 생각해보면 나 자신에 대해 조금 더 굳건히 믿음을 가지고 있는 때는 지금인 것 같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크고 작은 실패와 후회들의 순간들로 다져지고 길들여진 지금의 나인 것이다. 반대로, 나 자신을 맹목적으로 조건 없이 믿던 시절이 있었고 그때가 바로 1년의 재수생 시절이다. 내가 실제로 잘하고 있는지의 결과와 무관하게 무조건적으로 잘하고 있으며, 결국 잘될 것이라는 신념이 자리 잡던 것이다.
누군가는 그때는 자신감이 없었기에 자신을 갈망했었고, 그래서 어느 정도 소유하고 있는 지금이 더 좋은 것이지 않겠냐고 말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보다 재수생 시절이 더 그립고 동경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때만큼 갈망했던 것 그 이상으로 나를 위해 새우잠을 자며 꾸준함의 힘으로 지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많이 걱정하고 불안했던 역사의 조각들이다. 그래도 그때는 쓰라린 걱정과 불안들은 화로의 장작들처럼 열정으로 타오르며 나를 움직이고 키웠다. 그래서인지 그 장작들은 이따금씩 지금까지도 꺼지지 않은 불씨들로 남아 식어버린 자신감들의 잔해 속에서 이글거리곤 한다.
재수생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단순히 너무 내가 힘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나만 힘든 것이 아닌, 가족들도 같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학원비와 타지살이에 드는 온갖 생활비, 그 곱절 이상으로 걱정과 염려로 들어간 마음의 지출들은 계산할 수 없다.
그래도 그때를 동경하는 이유는 오직 단 하나, 나를 항상 움직이게 했던 자신에 대한 갈망의 힘 때문이다. 그 이후로 나는 크고 작은 실패들을 통해 현실의 상처에 아프지 않기 위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뎌져 가고 있다. 그 방법이 훨씬 덜 아프고 나를 진통제처럼 아프지 않다고 속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진통제가 결국 효과가 다하여 통증이 유발되는 것처럼 완치가 되지 못하고 깊은 곳에서 아려오기 일쑤였다. 사실 알고 있던 것이다. 무뎌지는 것보다 강해지는 것이 더 나은 처방전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자신감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 것일까. 불교의 무소유처럼 오히려 나는 무소유를 하고 있던 것일까. 이러한 생각들이 끝없이 꼬리를 물고 늘어질 때면 자신을 갈망하던 때를 동경하게 된다.
나 자신부터 진정성 있게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동경을 꿈처럼 늘 바라고 쫓아가고 있다. 나는 이 갈망이 끝나길 바라는 것일까. 오히려 죽을 때까지 갈망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점점 엉킨 실타래 속을 걸어가는 것처럼 이 생각의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지만 나는 이 길을 걸어가려고 한다. 나 자신에 대한 끝없는 갈망이 미래의 나를 어떠한 모습으로 만들어 마주하게 만들지 기대가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