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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경수 Oct 26. 2023

잠재적 예술

Potential art

예술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

  1917년 어느 작가가  독립미술가협회전시회에 <샘>을 출품한다. 이 독립미술가협회는 뒤샹이 알렌스버그, 월터 팩 등과 함께 설립한 협회였다. 독립미술가협회는 특이하게 심사위원도 없고, 상도 없는 미술전으로, 전시회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소정의 수수료만 내면 작품을 전시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근데 <샘>이라는 작품은 출품을 거부당했다. 그 이유가 뭘까?


마르셀 뒤샹 - <샘>(1917)

  그 이유는 동네 철물점에서 파는 소변기에 서명만 하고 작품으로 제출했기 때문이다. 위의 사진이 그 작품인데, 작가의 이름이 '리차드 무트'이기 이기 때문에 'R.Mutt'라고 서명이 되어있다. 전시회가 진행되는 동안에 이 작품은 후미진 곳에 방치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커튼으로 가려져서 아무도 그게 작품인지 몰랐다고 한다.


  이후 독립미술가협회의 마르셀 뒤샹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발간하는 다다이즘 잡지인 <The Blind Man>에 리차드 무트라는 무명의 작가의 <샘>을 옹호하는 아래의 글을 투고했다.


"분명히 어느 예술가라도 6달러를 내면 전람회에 참여할 수 있다. 머트 씨는 <샘>을 출품했다. 그런데 아무런 의논도 없이 그의 작품이 사라졌다. 머트 씨의 <샘>이 배척당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변기가 부도덕하지 않듯이 머트 씨의 작품 <샘>은 부도덕하지 않다. 배관수리 상점의 진열장에서 우리가 매일 보는 제품일 뿐이다. 머트 씨가 그것을 직접 만들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 일상의 평범한 사물이 실용적인 특성을 버리고 새로운 목적과 시각에 의해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생각으로 창조된 것이다."

  

  리차드 무트는 사실 뒤샹의 가명이었다. 즉, 리차드 무트가 뒤샹이었던 것이다. 변기에 대한 미학적 변호와 재판은 뒤샹의 자작극에 의해서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이후 <샘>은 미술계에 큰 획을 긋는 미학적인 작품으로 인정받게 된다.


왜 저게 작품인가?

  왜냐하면 예술계가 작품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런 권위를 줬는가? 그건 그들이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저 작품은 다른 기성품들도 예술작품으로써 존재할 가능성을 만들게 되었고, 저 예술이 예술가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어찌 보면 해석학적 순환이다. 예술가는 예술을 만들고, 예술은 예술가를 만들고, 그리고 그 예술가는 다시 예술을 만들고... 이 과정의 무한한 반복이 현대미술이 예술인 이유다. 꼬리가 꼬리를 물고 놔주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근친상간은 그들의 가족이 아니면 이해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만약 내가 어떤 것을 작품이라고 규정하고, 전시하면 그건 다 작품인가? 주관적으로 봤을 때 그것은 충분히 작품이 될 수 있다. 예술이란 대자존재가 자신의 정신을 표현하는 행위인데, 이에 위반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 혼자 예술로 여기고, 감상한다면 그게 의미가 있을까. 사람들은 예술행위를 하고 결과물을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 어떻게 보면 예술은 인정투쟁이다. 대중에게, 그리고 다른 예술가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더 독창적인 작품을 창조하고, 주목을 받고 싶어 한다. 그래서 변기는 작품이 되었고, 물감덩어리는 추상화가 되었고, 정교하지 않은 것이 정교한 것보다 더 예술이 되었다. 이제 예술은 물리적 제작활동을 필수로 요구하는 행위가 아니다. 서명을 제외하고는 뒤샹은 그 변기에 아무런 물리적 활동을 가하지 않았다. 또한 만초니는 자신의 변을 싸고 그저 용기에 담았을 뿐이며, 카텔란은 바나나에 테이프를 하나 붙였을 뿐이다.


작품이라 불리는 작품들

왼쪽부터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1965~) -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1991), 피에르 만초니(Piero Manzoni,1933~1963) - <예술가의 똥>(1961),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 1960~) - <코미디언>(2019)

  데미안 허스트는 동물의 사체를 포르말린에 넣어서 예술작품을 만들었고, 피에르 만초니는 자신의 용변을 보고 용기에 담음으로써 예술작품을 만들었고,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일반 바나나에 덕트 테이프를 붙여서 예술작품을 만들었다. 이 외에도 작품이라 불리는 작품들은 셀 수 없이 많다.


푸코와 니체의 미학

  칸트, 헤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제도권 안의 철학자들은 그들의 미학을 논할 때 예술작품을 통해서 풀어나간다. 따라서 구체적인 작품이나 특정 장르를 언급하며, 그들의 미학을 논한다. 즉, 예술작품을 논하는 그들의 철학을 미학이라 한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예술작품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을 그들은 작품과 사유를 통해서 도출해 낸다. 그런데 니체와 푸코라는 스스로 제도권 밖의 철학자임을 자처한 사람들은 다르게 미학을 구축했다. 그들은 삶 자체가 예술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예술을 사물과 같은 즉자들을 통한 테크네(Techne)로 한정하지 않고, 대자존재의 실존의 기술 즉 실존의 테크네 자체를 예술로 보았다. 예술이란 작품을 만드는 행위에 국한되지 않았다. 아니, 삶이 그들에게 작품으로 치환되고, 작품을 만드는 행위는 실존으로 치환되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구축해 나가고, 스스로 형성해 가는 과정 자체가 그들에게 예술이자 미학적인 요소였다.


다음은 무엇이 예술이 될까

  공산품도 예술이 되고, 용변도 예술이 되고, 과일도 예술이 되고, 심지어 살아 숨 쉬는 실존 자체도 예술로 취급되어 미학에서 다룬다. 시각과 청각에만 자극을 주던 예술이라는 장르가 두 감각만을 만족시키기로는 성이 안 차는지 그 외의 것들에도 자극을 준다. 어쩌면 철학은 이성에 자극을 주는 예술이고, 요리는 미각에 자극을 주는 예술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요즘에 말 많은 마약도 감각에 자극을 주기 때문에 예술이 될 수 있을까? 마약을 안 해봐서 그들의 황홀경은 모르지만, 좋기 때문에 그것을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예술은 윤리적으로 허락되는 경계 안에서만 예술로써 존중된다. 마약을 하는 행위가 아무리 황홀한 쾌락을 준다 해도, 그것이 윤리적으로 그르다면 그건 범죄다. 그렇다면 범죄가 아니며,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무언가가 우리에게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올 것이다. 기성품으로 예술을 하는 건 뒤샹이 했고, 용변이나 체액으로 예술을 하는 건 마크 퀸, 만초니가 했다. 음식은 카텔란이 했고, 데미안 허스트는 시체로 예술을 했다. 그럼 대체 이제 뭐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갑툭튀 할 수 있을까?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의 경계는 아직 남아있을까? 만약 그 경계가 사라졌다면 모든 것이 예술일 텐데, 모든 것이 예술이라면 그건 예술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담 예술의 진보는 끝인가. 아니면 우리에게 미학적 쾌를 줄 다른 무언가가 남아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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