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이 가르쳐준 세상
어린 시절 나는 음식을 대할 때 안 좋은 습관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젓가락질이 바르지 않다고 지적받을 때가 많았고, 뜨거운 음식을 성급히 삼키다 입천장과 볼 안쪽살이 데어 물집이 잡힌 적도 적도 부지기수였다. 뿐만 아니라 입 안에서 맛을 천천히 느끼기보다는, 마치 빨리 먹는 게 미덕이라도 되는 양 후루룩 넘겼다. 어쩌다 목이 막혀 다급히 물을 찾기라도 하는 날에도 ‘그래도 남들보다 빨리 먹었네’라는 알 수 없는 자부심이 있었으니, 참으로 개선하기 어려운 버릇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단점의 정점을 찍은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음식 외모지상주의였다. 내가 봤을 때 맛있게 생긴 음식은 환영했지만, 맛없게 생긴 음식은 외면했다. 그 결과 나는 수없이 많은 음식들에게 배신당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첫 번째는 용과를 들 수 있다. 붉은 껍질 위로 화려한 비늘이 번쩍번쩍 솟아있고, 반으로 가르면 하얀 속살에 검은 씨앗이 총총 박혀 있었다. 보는 순간 이국적인 달달함이 연상되었다. 그러나 한입 베어 물자, 혀 위에 남은 건 ‘밍밍한 달달함’이었다. 물 많은 무에 점박이 붙은 버전에서 조금 더 달달해진 맛이라고 생각했다. 더덕구이도 나를 배신했다. 불판 위에서 자르르 흐르던 윤기는 고기 못지않게 먹음직스러웠지만, 씹을수록 쓴맛이 입안을 장악했다. 매끈한 곡선에 연둣빛 피부를 가진 아보카도는 케이크 같은 디저트를 연상시켰다. 하지만 내가 맛본 아보카도는 퍽퍽하고 기름진 데다가 느끼했다. 가지는 보랏빛 가죽 외투를 입고 있는 모델같이 세련된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익힌 뒤의 물렁물렁해진 식감이 도저히 참기 어려웠다.
단지 겉모습으로 음식의 평가를 매기다 보니, 끝내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도 많았다. 닭발이 대표적이다. 번들거리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피부에 촘촘한 발톱은 마치 공포 영화 속 시체의 일부 같았다. 주변에서 아무리 맛있다고 권유해도 도저히 입안에 넣을 수가 없었다. 번데기, 선지, 양갱, 미더덕은 이름만 들어도 젓가락이 멈췄다. 누군가에겐 별미였겠지만, 내겐 차마 넘지 못한 장벽이었다.
하지만 음식에 대해 단편적인 평가를 함부로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음식이 먼저 나에게 알려줬다. 생으로 먹으면 떫고 밋밋하기만 하던 무가 소고기와 함께 끓여지자 국물의 깊이를 책임지는 주인공으로 변했다. 단단하고 심심하기만 했던 우엉은 김밥 속에서 단짠의 균형을 완성했고, 날로 먹으면 알싸했던 파는 어묵탕 속에서 감칠맛을 더했다. 퍽퍽한 아보카도는 샌드위치 속에서 부드러운 크림처럼 바뀌었고, 지루하던 당근은 케이크와 볶음밥 속에서 빛나는 조연이 되었다. 화장과 머리 모양에 따라 얼굴이 달라지듯, 조리법은 재료의 장단점을 조율하며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 주었다.
그렇게 나는 가지와도 결국 화해하게 되었다. 처음엔 물컹거린다는 이유로 늘 밀쳐 두던 재료였는데, 영화 라따뚜이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화면 가득 펼쳐진 가지·호박·토마토가 층층이 쌓여 구워지는 장면은 마치 무대 위의 화려한 공연 같았다. 저렇게 아름답게 생긴 음식이라면 분명히 맛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문제는 우리 동네 어디에도 라따뚜이를 파는 곳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검색해도 식당이 나오지 않자 나는 결국 친구를 끌어내 서울까지 원정을 떠났다. 낯선 골목의 작은 식당에서 마침내 한 접시를 마주했을 때, 나는 괜히 웃음이 났다. 토마토의 산미와 어우러진 가지의 부드러움은 내가 알던 물컹한 채소가 아니었다.
조리법이 외모를 바꿔 놓는다면, 취향은 그 외모를 사람마다 다르게 읽히게 만든다. 나는 엄마의 김밥이 세계 최고라고 믿었다. 그런데 몇몇 친구들은 내가 운동회날 싸 온 김밥을 한입 먹고 “이상하다”라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 집 김밥에는 시금치 대신 오이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몇몇 친구들은 오이맛이 난다며 젓가락을 내려놓았지만, 나는 오이 특유의 아삭한 맛 덕분에 오히려 더 산뜻하다고 느꼈었다. 오이가 맛이 없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살짝 충격받았었다.
급식의 콩밥도 그랬다. 흰밥에 섞인 까만 콩을 “돌멩이 같다”며 골라내던 친구가 있었다. 하지만 내겐 그 콩이 고소하고 담백한 별미였다. 나는 친구의 밥에서 콩을 골라 대신 먹었다. 같은 음식도 느끼는 이에 따라 돌멩이가 되기도 하고, 고소한 보물이 되기도 했다.
심지어 음료수에서도 취향의 갈림길은 선명히 드러났다. 당시 인기 절정을 달리던 포도 봉봉. 나는 이 음료가 달콤하고 청량해서 좋아했지만 씹히는 알갱이는 싫어했다. 목으로 넘길 때마다 걸리적거려 음료를 마시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친구들은 알갱이를 먹기 위해 그 음료를 마신다고 했다.
그때는 단순히 “내 취향은 좀 다르구나” 하고 지나쳤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오이김밥의 풋내, 콩밥의 까만 콩, 포도 봉봉의 알갱이까지 모두 같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결국 음식을 보고 맛있게 생겼다, 맛없게 생겼다, 음식이 맛있다, 음식이 맛없다 하는 판단은 단지 개인의 취향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음식을 통해 외모지상주의가 얼마나 허망한 기준인지 알게 되었다. 겉모습이 매혹적이라도 맛이 없으면 다음부터는 찾지 않았다. 아무리 맛없어 보여도 놀라운 깊이를 드러낸 음식이면 계속 손이 갔다.
사람도 마찬가지지 않은가. 외모보다 더 중요한 건 같이 있을 때 얼마나 즐거운지, 얼마나 편안한지가 오랜 관계를 지속하게 되는 힘이니 말이다. 포장지에 가려진 진짜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가까이 다가가 보고, 서로 어울려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음식이 내게 가르쳐 준 건 단순한 배부름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눈이었다.
그런 깨달음의 끝에 나는 양갱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할머니는 양갱을 굉장히 좋아하셨고, “이거 엄청 맛있다”라고 나에게 자주 권하셨었다. 하지만 난 그럴 때마다 단호히 거절했다. 검은빛 나는 광택과 질감이 도저히 먹는 음식 같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편견을 타파해 보고자 나 자신을 타일렀다. 그렇게 입에 넣은 양갱은 충격적이었다. 호빵 속 들어있는 단팥과 닮았지만 훨씬 은은하고 절제된 단맛과 부드럽게 풀리는 질감이 추가되어 있었다.
“양갱이 이렇게 맛있는 거였어?"
세상에는 여전히 낯설고, 불편하고, 그러나 어쩌면 아름다울 수 있는 맛들이 남아 있다. 그 맛을 알아볼 수 있는 혀와 마음을 기르는 일, 그것이 내가 음식을 통해 배운 음식에 대한 예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