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간을 맞추는 방법
나는 꽈배기라면 설탕을 듬뿍 묻혀야 하고, 순대는 떡볶이 국물에 푹 찍어 먹어야 제 맛이라고 생각한다. 순댓국을 시키면 파와 부추 다진 양념을 아낌없이 넣어야 숟가락이 간다. 밍밍한 맛은 도무지 입에 붙지 않는다. 삶도 그러해서 밍밍하고 싱거운 나날은 내 성격과 맞지 않는다. 그런데 직장인이 된 후에는 매일 같은 지하철, 같은 자리, 같은 업무를 반복하며 하루를 흘려보내게 되었다. 계절이 바뀌어도 출근길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고, 퇴근길의 피곤함 역시 언제나 그대로였다. 간을 하지 않고 끓인 국물처럼 내 삶은 공허하고 무미건조하게만 느껴졌다. ‘이러다 내 삶도 밍밍하게 끝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생겼다.
나는 이런 타성을 깨기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자극을 찾아 헤맸다. 일본어를 배워 보기도 했고, 보드게임 동호회 활동이나 독서모임에도 참여해 보았다. 여행을 가기도 하고, 그림을 그려보기도 했으며, 꽃꽂이를 배워본 적도 있다. 하지만 모든 새로움은 잠시뿐이었다. 조금 익숙해 지자 다시 삶이 다시 밍밍해졌다. 그래서 이번 여름에는 수영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물속에 잠긴다는 건 생존 본능이 거부하는 행위였다. 인간의 본능을 뛰어넘는 행동을 한다면 타성이 쉽게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발끝이 수영장물에 닿자 파문이 번졌다. 허리까지 물이 밀려오자 익숙한 공기의 세계가 멀어지고 낯선 물의 세계가 열렸다. 자유형을 처음 배웠을 때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팔을 저으면 앞으로 나아가고 물속에서 숨이 이어졌다. 물속에서 숨을 쉴 수가 있다는 감각 하나만으로도 나는 흥분했다. 배영 역시 금세 익숙해졌다. 등을 물 위에 기대고 하늘을 보며 나아가는 일은 늘 바닥만 보며 걷던 일상과는 전혀 달랐다. 그때의 나는 ‘내가 무언가를 이렇게 재밌게 배울 수 있다니’ 하며 감탄했다. 수영 강습이 있는 날이면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하루 종일 나와 함께 했다. 삶이 달달해졌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삶이란 맛이 이래야지!'
하지만 즐거움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평형에서 막히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다리를 오리발처럼 벌리고 모아야 하는 그 단순한 동작이 내 몸에서는 도무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제자리에서 허우적대기 일쑤였다. 강사의 “조금만 더!”라는 말은 격려라기보다는 고통의 연장이었다. 수영이 처음처럼 신나는 놀이가 아니라 또 하나의 숙제처럼 느껴졌다. 새로운 걸 배운다는 설렘은 사라지고 기계적으로 수업을 참석하는 반복의 무료함만이 남았다. 삶이 다시 밍밍해졌다.
나는 시청에서 운영하는 수영장을 다녔었는데 저렴한 가격으로 운영을 하다 보니 경쟁률이 매번 몇십대 일로 굉장히 높았다. 모두가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는 생각은 내가 수영을 그만두지 못하게 만들었다. 타성에 절여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귀한 자리를 쉽게 포기하는 건 아까웠다. 그래서 밍밍함을 견디는 또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 그렇게 눈길이 간 건 바로 다이소 매대에 놓인 방울토마토와 무순의 씨앗이었다. 값도 부담 없었고 물만 주면 싹이 난다는 단순함이 마음을 끌었다. 아마 그것은 어린 시절의 기억과도 닿아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무순 키우기’ 관련된 내용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 다 같이 무순을 키워보자고 제안하셨다. 무순 키우는 일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일단 접시에 키친타월을 접어 올렸다. 분무기로 물을 흠뻑 적신 뒤 물에 살짝 불려 놓은 씨앗을 조심스레 흩뿌리면 준비는 끝이었다. 그리고 햇빛이 직접 닿지 않게 신문지로 덮어두고 하루 한 번 정도 물을 뿌려주면 되었다. 그렇게 이틀 사흘이 지나면 키친타월 위로 초록빛줄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별다른 노력 없이 쑥쑥 자라는 무순이 기특했고 내가 이걸 키워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또 하나의 기억은 방울토마토였다. 아마 식물관련해서 배우던 때로 기억하는데 선생님의 제안으로 우리 반 아이들은 모두 작은 화분에 방울토마토 모종을 키웠다. 그런데 어느 날 강한 바람이 불어 내 화분이 교실 창턱에서 굴러 떨어지고 만 것이었다. 흙이 쏟아지고 작은 줄기가 꺾여버렸다. 그 순간 나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 왜 하필 내꺼야? 화분이 저렇게 많은데?" 엉엉 울고나 나서야 비로소 알았다. 돌보는 시간 속에서 식물은 단순한 과제가 아니라 내 마음 한 조각이 되어 있었음을.
그때의 추억이 마음속에 남아 있었기에 당연히 ‘그때 재밌었으니 이번에도 재밌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순 씨앗, 방울토마토 씨앗에 상추 씨앗까지 구입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무순이 3일 만에 금세 시들어버린 것이었다. 맨 처음에는 젖은 키친타월을 매일 갈아주어 씨앗이 죽었나 싶어 키친타월의 색이 누렇게 변색되는 것이 보여도 끝까지 갈지 않았었는데 아주 작은 흰색 애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모습을 보고 기겁했었다. 도대체 애벌레들은 어디서 나올 걸까 싶었다. 그 뒤로 화장솜에도 무순 키우기를 시도하고, 빛을 차단해 주는 덮개를 비닐봉지에서 신문지로 바꿔 보았지만 계속 무순은 3일 ~ 4일 차가 되면 싹이 노란색으로 변하더니 줄기가 부러졌다. 초등학생때 무순을 키워낸 적도 있었고, 인터넷을 뒤져보아도 무순은 그냥 둬도 몇일이면 쑥쑥 자라던데 왜 나의 무순은 왜 3일이면 시들어 버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방울토마토는 자라긴 했지만 너무 느려 답답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꽃이 피지 않았다. 상추는 이파리가 너무 작았다. 아빠는 우리 집이 17층이라 높아서 잘 자라지 않는 것 같다고 하셨지만 인터넷에서는 나보다 더 높은 층에서도 무성하게 키워낸 사람들이 많았다. 싹이 나고 자라는 과정이 너무 느리고 실패가 계속되다 보니 결국 지루함이 찾아왔다. 그래도 그냥 물을 주면 크고 안 주면 말라버리는 단순한 과정이라 방울토마토와 상추를 심은 흙에 물이 마른 것 같으면 채워주는 일은 계속했다. 그러자 나도 느끼지 못한 사이에 시간이 흘러 상추의 잎은 어느새 고기를 쌀 수 있을 만큼 커졌고, 방울토마토 줄기에는 작은 꽃이 피었다. 밍밍하던 하루의 맛에, 성취라는 한 꼬집의 간이 더해지자 비로소 삶이 제 풍미를 찾았다. 초반의 설렘, 중간의 지겨움, 그리고 끝내 얻게 되는 성취의 달콤함.
그리고 어찌 되었든 수영을 계속하다 보니 비록 느리지만 평형으로 레일을 왕복할 수 있게 되었다. 자유형과 배영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나는 한 번도 쉬지 않고 평형으로 처음 레일 왕복을 성공한 날 수영이 재미있던 시절 써 두었던 일기장을 찾았다. 펼쳐보니 글씨마다 수영장의 물기가 배어 있는 듯했다.
“오늘 드디어 음파! 성공. 물속에서 숨방울이 올라가는 게 마치 두려움이 내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 문장은 내가 물과 처음 친구가 되었던 순간을 또렷하게 품고 있었다. 다른 장에는 킥판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무섭다고 킥판을 강하게 붙잡을수록 더 가라앉는다. 힘을 빼야 앞으로 나아간다.”
당시엔 단순한 수영 기술이었겠지만 다시 읽으니 인생에 대한 은유처럼 다가왔다. 무언가를 움켜쥘수록 오히려 무거워지고 놓아야 비로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 그다음 부분에는 지유형 완주의 기쁨이 적혀 있었다.
“처음으로 한 레인을 수영으로 돌았다. 온몸이 납덩이같았는데 레일 끝에 도착하자 숨보다 웃음이 먼저 터졌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그날의 벅참이 나를 덮쳤다.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물 위를 기어이 건너갔던 순간의 환희가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그리고 일기장이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이런 즐거움을 느끼지 않았었냐고. 그러면 된 거 아니냐고.
성장은 언제나 느리고, 그 과정은 지루했다. 수영도, 식물도, 인생도 처음엔 새로움이란 자극적인 맛으로 시작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물살에 휩쓸리고 씨앗은 좀처럼 싹을 내지 않았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물을 주고 몸을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잎이 돋고 몸이 앞으로 나아갔다. 결국 삶의 간을 맞추는 방법은, 성취로 하루의 밍밍함을 덜어내는 일이었다.
'그래 바로 이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