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과 다이어트 사이에서

믿음이 아니라 감각으로

by 조새늘

18세기와 19세기 유럽에서는 수은이 신비한 만병통치약처럼 쓰였다. 특히 수은 화합물인 칼로멜은 매독 치료제로 널리 사용되었고, 일부 미용 크림에도 첨가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수은이 체내의 불순물을 배출하고 활력을 준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신경계 손상, 치아 탈락, 잇몸 괴사, 정신 이상 같은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켰다.


20세기 초 라듐이 ‘건강의 상징’으로 떠올랐었던 시기도 있었다. 마리 퀴리의 발견 이후 라듐은 신비한 빛을 내는 물질로 주목받았고, 사람들은 그 빛을 ‘생명의 에너지’로 여겼다. 미국에서는 ‘라디소어(Radithor)’라는 이름의 라듐 강장제가 시판되었고, 프랑스에서는 라듐을 함유한 화장품 ‘Tho-Radia’, 독일에서는 방사성 치약 ‘Doramad’ 이 건강 제품으로 광고되었다. 심지어 ‘라듐 초콜릿(Radium Schokolade)’ 같은 식품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곧 방사능 피폭으로 인한 질병과 사망 사례가 보고되면서 라듐의 빛은 '생명의 에너지'에서 ‘죽음의 에너지’로 바뀌었다.


생명은 인간이 가진 가장 근원적인 가치이기에,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건강해지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아왔다. 그 믿음이 언제나 옳았던 것은 아니기에 건강의 진리는 늘 누군가에 의해 새로 쓰였다. 나도 그 끝없는 실험의 일부였다. 시간이 지날 때마다 다른 진리를 믿었고, 내 식탁의 원칙도 수없이 바뀌었다.


아침밥은 원래 나의 하루를 여는 신호였다.

엄마가 부엌에서 국을 끓이는 동안, 밥솥 뚜껑을 열면 흰 김이 얼굴을 덮쳤다. 그 순간의 포근한 열기가 마치 보약처럼 하루를 지탱할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 같았다. 아침밥을 먹으며 아빠는 말씀하셨다.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

그 말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었다. 그 세대의 철학이자 생존 방식이었다. 밥을 거르는 건 몸을 학대하는 일이었고, 아침을 굶는 건 게으름의 상징이었다. 당시 mbc의 느낌표에서는 “아침밥을 먹읍시다!”라는 코너가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아침식사를 거르지 않는 습관을 권장하고, 이를 통해 국민의 건강 증진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내 휴대폰 화면 속에는 정반대의 진리가 떠다닌다. 단식은 장수의 비결, 공복은 최고의 약. 더불어 “밥이 보약”이라는 신념은 저탄고지 열풍 앞에서 쪼그라들었다. 탄수화물 자체를 건강과는 거리가 먼 종족이라 취급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밥솥 안에서 갓 지어진 밥이 억울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듯했다.

“나, 너에게 힘을 주던 친구 아니었니?”

“나 너 키워줬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등을 돌려?”


샐러드는 한때 내가 가장 믿는 건강식이었다. 입 안에서 오독오독 씹히는 양상추의 질감이, 마치 내 장 속 독소까지 씹어 삼키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생채소에는 독성이 있으니 반드시 쪄서 먹어야 한다”는 기사를 봤다. 내가 믿어온 ‘건강’의 기준이 흔들렸다.


저염식도 마찬가지였다. 건강을 위해 소금을 줄였는데, 이번엔 너무 싱겁게 먹으면 오히려 혈압이 불안정해진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그날 이후 나는 된장찌개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넌 나를 살릴 거야, 아니면 망칠 거야?”


그리고 어느 날, 유튜브 알고리즘은 나에게 충격적인 영상을 보여줬다. 오줌을 마시면 건강이 좋아진다는 ‘오줌 요법’. 영상 속 사람들은 진지했다. 나는 웃어야 할지, 따라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건강을 더 나아지게 만들고자 하는 열망이 시대를 넘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그리고 그 열망이 현실에서 가장 자주 그리고 일반적으로 선택된 방식은 다이어트였다. 고대 그리스에는 ‘절제된 생활방식’을 뜻하는 다이어타(diaita)라는 단어가 있었다. 당시의 다이어트는 지금처럼 살을 빼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삶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태도에 가까웠다. 중세의 여성 수도자들은 금식을 통해 영혼을 단련했고, 절제는 신앙과 건강의 미덕으로 여겨졌다.


1960-70년대부터 과체중·비만이 질병의 위험요인으로 학계와 보건당국에서 인식되기 시작했고, 1970-80년대에는 영양 및 비만을 예방하기 위한 공중보건 캠페인이 여러 국가에서 실행되었다. 지방과 당분을 줄이고, 체중을 관리하는 것은 곧 ‘현대인의 자기 통제’이자 건강을 증명하는 행위로 여겨졌다. 이때부터 다이어트는 병을 예방하는 자기 관리의 상징이 되었다.


나 또한 그 오랜 신앙의 한 신도였다. 비만은 만병의 근원이라 들었고, 살이 찌면 관절에 무리가 가고, 혈압과 혈당이 오르며 각종 질병의 위험이 커진다고 배웠다. 그래서 나는 다이어트를 단순한 외모 관리뿐 아니라 건강을 지키기 위한 습관이라고 믿었다. 즉 마른 체형을 유지하는 것이 곧 자신을 돌보는 일이라 여겼다.


공복이 건강에 이롭다는 말을 믿고, 나는 18시간 단식과 6시간 식사로 이어지는 루틴을 시작했다. 당연히 운동도 병행했다. 아침에는 가벼운 스트레칭과 요가로 몸을 깨웠고, 저녁엔 동네를 한 시간씩 걸었다. 그렇게 며칠, 몸은 점점 가벼워졌다. 나는 건강을 되찾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일주일 후 속이 불에 덴 듯 쓰라려졌다. 밤마다 이불 위에서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채 뒤척였다. 위가 항의하기 시작했다. 마치 안에서 마이크를 잡고 외치는 듯했다.

“이 집, 영업 안 하나요?”

남들은 공복으로 건강을 찾았다는데, 나에게 있어 공복은 약이 아니라 위를 태우는 불씨였다.


레몬 디톡스 다이어트는 더 극적이었다.

잡지와 방송에서 ‘연예인들의 비밀’이라며 떠들어대던 그 방식. 레몬즙에 메이플 시럽과 고춧가루를 섞어 음료를 만들었다. 처음엔 ‘생각한 것보다 의외로 먹을 만하네?’ 싶었다. 그러나 삼일째, 위는 활활 불타기 시작했다. 그때 몸속에서 레몬이 째려보며 중얼거리는 듯했다.

“나 원래 비타민 담당이지, 위산 폭탄마는 아니거든?”


물을 많이 마시면 노폐물이 빠지고 포만감이 늘어 다이어트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심지어 피부까지 맑아진다고 하니 나는 그 속설 혹은 정설을 충실히 따랐다. 책상 위에는 늘 반쯤 비어 있는 텀블러가 있었다. 그러나 피부는 그대로였고, 달라진 건 방광뿐이었다. 화장실을 너무 자주 가는 바람에 평소 좋아하던 드라마에도 집중하기 힘들었다. 운동을 하다가도 화장실을 가고 싶어 흐름이 자주 끊겼다. 물은 내 몸을 정화하기는커녕, 나를 화장실 순례자로 만들어버렸다.


고구마와 두부를 돌아가면서 하루 3시 3끼 먹어 본 적도 있다. 그리고 닷새가 지나자, 귀에서 ‘삐—’ 하는 소리가 멈추질 않았다. 샤워기 밑에서 머리를 감을 때 손가락 사이로 엉겨 나온 머리카락이 배수구를 막았다. 물은 내려가지 않았고 머리카락만 무서운 속도로 쌓여갔다. 그 순간 고구마와 두부가 항의하듯 말했다.

“나 혼자만으론 버겁다니까. 밥도, 반찬도 좀 불러와 줘.”

"야! 너 건강식 아냐?"

내 입은 고구마와 두부에게 반문했지만, 사실 몸은 이미 그 항의에 동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사람들의 “너 진짜 예뻐졌다!”라는 말은 귀에 꿀처럼 달라붙어 쉽사리 떼어낼 수 없었다. 거울 속 얼굴이 갸름해진 것도 뿌듯했다. 건강을 위한다는 명목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피부에는 이상한 알레르기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도무지 가려워서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약을 바르면 가라앉았지만 어느새 다시 올라왔다. 알레르기 검사를 해봐도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다이어트는 처음엔 건강을 되찾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몸을 돌보던 마음은 점점 몸을 통제하려는 강박으로 바뀌었고, 나는 건강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나 자신을 끊임없이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이게 정말 내 몸을 위한 걸까?’ 하지만 정작 ‘건강하게 산다’는 게 무엇인지 묻기 시작하자, 그 답은 생각보다 모호했다. 건강 정보는 시간에 따라 달라져 왔다. 어쩌면 내가 지금 옳다고 믿는 방식도 미래엔 또 다른 오류로 바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본질로 돌아가 보기로 했다. 복잡한 계산 대신, 단순한 감각으로. 먹었을 때 속이 편안한지, 잠들기 전 몸이 고요한지, 그 작은 신호들 속에서야 비로소 진짜 균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유행하는 건강법 대신, 내 몸이 내는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로 했다. 건강은 남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살아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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