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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아닌 이름 17장

GeneaLink와 John

by 아티크 Artique

3년후, 샌프란시스코 사무실.

GENEALINK의 첫 키트가 시제품으로 완성됐다.

가벼운 박스 속엔 사용 설명서와 함께 침 샘플 채취 도구, 반송용 봉투, 등록 QR코드가 들어 있었다.


“집에서 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고, 모든 등록은 익명 기반으로 처리됐다.

가족을 찾기 위해선 입양서류보다, DNA가 더 정확한 시대를 만들고자 했다.


하루하루가 고비였지만, 에밀리는 존과 함께할 때면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그의 조용한 집중력, 논리적 설명, 때로는 무심하게 건네는 따뜻한 말들이 그녀의 마음에 작은 불씨를 지폈다.


어느 늦은 밤, 둘이 남아 데이터베이스 UI 디자인을 검토하던 중, 존이 조용히 물었다.

"동생을 꼭 찾고 싶어요?"

에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찾으면... 뭐라고 말할지 정하지도 못했어요. 근데, 안 찾으면 너무 아플 것 같아서요."


존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말했다.

"우리가 만든 이 시스템을, 당신 동생도 쓰게 될 거예요. 그리고 그때… 그 아이가 찾게 될 건 당신이에요."


그 말에 에밀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음속에 아주 조심스러운 예감 하나가 싹텄다.


어쩌면 이 사람과 함께라면, 잃어버린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것도 만들어갈 수 있을지도 몰라.


GENEALINK

가족을 잇는 기술. 그리고… 두 사람의 인연을 잇는 시작.


2008년, 샌프란시스코
회사 설립 이후 거의 10 년.
GENEALINK는 여전히 적자 상태였다. 에밀리와 존은 각자 다른 회사를 다니며 월급을 받아 GeniaLink를 유지하고 있었다.

스타트업의 붐 속에 수많은 DNA 기반 서비스들이 생겨났다 사라졌다.
에밀리와 존은 종종 투자자에게 "입양인 감성팔이 서비스냐"는 조롱을 받았고,
데이터 보호 문제로 보건당국에 불려가 설명회를 열기도 했다.

어느 날, 직원 한 명이 울먹이며 퇴사를 말했다.
"좋은 뜻인 건 알지만… 전 이제 더이상 버틸 자신이 없어요."
사무실 안은 고요해졌고, 에밀리는 식은 커피를 들고 창밖만 바라봤다.

그날 밤, 존은 책상 위에 작은 종이 상자를 올려두고 말했다.
"다 정리하고, 우리 둘만 남더라도 계속 할래요?"

에밀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응. 왜냐면… 아직 가족을 찾고싶으나 찾지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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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가을.

기적은 아주 사소한 뉴스 기사 하나에서 시작되었다.
‘유럽계 입양인, DNA 매칭으로 생모와 재회’ —
GENEALINK 시스템을 통해 이뤄진 첫 성공 사례였다.

곧이어 CNN에서 관련 보도가 나갔고,
전 세계 입양인 커뮤니티에서 GENEALINK에 대한 문의가 폭주했다.
홈페이지는 한밤중에 다운되었고, 서버 증설을 위해 존은 사흘 밤낮을 사무실에 박혀 있었다.

2011년, 일본의 NHK, 미국의 NPR, 프랑스 공영방송 등에서도 GENEALINK의 사례를 다루기 시작했다.
입양인뿐 아니라, 전쟁 실종자 가족, 헤어진 쌍둥이, 장기 실종 아동 등에게도
이 서비스는 이제 많은 입양인들의 마지막 희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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