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끝에서, 예상치 못한 환대를 만났다
해외생활을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순간이 찾아오곤 한다. 그날 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또 하나의 뜻밖의 문을 열게 됐다.
그때 나는 어학원에 다니며 중국인 친구와 번역기로 대화를 나누던 시절이었다. 서로 초보적인 영어 실력에 의해 단어를 주고받으며, 우정은 천천히 깊어졌다. 금요일 저녁, 우리는 펍에 가기로 했다.
북적이는 펍 안에는 흑인, 백인, 도양인, 유럽인, 중동인까지 다양한 인종이 뒤섞여 있었다. 이국적인 풍경에 매료된 나는 음악에 몸을 맡기며 한껏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의 남자친구가 갑자기 펍으로 찾아왔고, 둘은 곧 다투기 시작했다. 화가 난 남자친구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고, 친구는 미안하다며 먼저 돌아가겠다고 했다.
나는 아쉬움에 “좀 더 놀다 갈게.”라고 말하며 혼자 남았다. 스탠드 테이블에 서서 음악을 듣고 있던 나는, 혼자라는 사실 때문인지 남자들의 접근이 잦아지는 것을 느꼈다. 슬슬 귀찮아지던 찰나,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뒤를 돌아보니 동양인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난 여기 살아, 가족들이랑 함께 왔어.”
그녀는 열여섯 명쯤 되는 가족들이 모여 있는 테이블을 가리키며, “혼자 있으면 위험할 수 있으니 우리랑 같이 있어.”라고 했다.
가족 모임이라며 안심시키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과 합석해 함께 어울리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말레이 화교 3세였다.
남동생과 누나를 중심으로 한 가족들은 무슬림이었고, 술 대신 음료를 마시며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가까워졌다.
펍이 문을 닫을 시간이 되자, 그녀의 남동생이 내게 말했다.
“우리가 가는 다른 곳이 있어. 같이 갈래?”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덜컥 그들의 손을 잡았다.
도시의 불빛이 점점 멀어지고, 차는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점점 황량해졌고, 어는 순간부터 도로에는 가로등조차 드문드문했다.
한참을 달린 끝에 차는 멈췄다.
눈앞에 보인 것은, 클럽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허름한 건물. 건물 외벽은 군데군데 금이 가 있었고, 문 앞에는 철제 자재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마치 공사가 멈춰버린 공사장 같았다.
“설마 여기?‘
그제야 등골이 서늘해졌다.
내가 앉아 있는 뒷자리에서 남매가 내렸다.
“내려 이쪽으로 와.”
나는 순간 몸이 굳어 버렸다.
끝없는 공허로 이어지는 듯했다.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 속에서, 내 머릿속은
‘여기가 긑인가?’라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내가 사람을 또 믿었네…‘
‘이거 이러다 진짜 큰일 나는 거 아냐?’
스스로를 책망하며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을 함부로 믿지 마라. 너 그러다 큰코다친다.”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이미 차 문은 열렸고, 돌아갈 방법도 없었다.
남매는 계단을 내려가며 손짓했다.
나는 속으로 수십 번을 망설이면서도, 결국
그들의 뒤를 따랐다.
어두운 복도를 따라가자, 입구 앞에는 건장한 두 남자가 서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막아서며 말레이어로 무언가를 물었다.
잠시 실랑이가 오갔고, 그 순간에도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망했다. 진짜 망했다.’
무겁게 닫힌 문이 열리는 순간 _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뭐야 이게 대체 나 여기서 죽는 건가…’
인신매매, 장기이식, 온갖 굳은 것들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공사장까지 따라온 건지,
대체 이런 무모한 담대함과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넌 영화도 안 봤어? 조심! “
엄마가 눈에 보였다. 이런 생각으로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내 눈앞에 쏟아진 건
쿵쾅거리는 음악, 번쩍이는 조명, 그리고 춤추며 웃고 있는 사람들.
방금 전까지 등골이 서늘했던 내 몸이, 한순간에
뜨거운 열기로 휘감겼다.
내가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전에,
갑자기 클럽 안에서 dj가 마이크를 잡고 소리쳤다.
“스페셜 게스트! 오늘 밤, 우리의 특별한 친구를 소개합니다.!”
…응? 나?
갑자기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됐다.
나는 고개를 돌려봤지만,
이 클럽 안에 나 말고 외국인은 아무도 없었다.
그 순간,
샴페인이 터졌다.
스파클러 불꽃이 반짝였다.
폭죽이 팡팡 터졌다.
“웰컴 투 제이”
그 당시 내 영어 이름이 제이였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잔을 들고 나를 향해 축배를 들었다.
… 이거 뭐야? 나 주인공 된 거야?
대 스타라도 반겨주는 것처럼 맞이해 주었다.
나는 당황한 채 얼떨떨했지만, 그 분위기를 맘껏 만끽했다.
순식간에 나는 말레이 무슬림들 사이에서 가장
핫하고 특별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문 앞에 건장한 두 남자에게
남매가 했던 말은 취조당하는 실랑이가 아니라
우리 친구라고 소개하고 보증하는 설명이었다고 한다.
여긴 무슬림 전용 비밀클럽.
당연히 외국인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남매는 나를 이끌고 왔고
나를 초대하고 거기에 샴페인과 축배를 내게
선사한 것이었다.
새벽이 밝아 올 때까지 그곳에서 춤추고 웃었다.
남매는 내가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끝까지 에스코드를 자청했다. 집까지 바래다주며, 마지막까지 포옹으로 인사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친구가 되었고, 명절에는 그들의 집에 초대받아 함께 식사를 하며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
쿠알라룸푸르에서의 그날 밤은 내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낯선 사람과의 만남, 두려움을 이긴 호기심, 그리고 뜻밖의 환대.
모든 것이 예상을 뛰어넘어 나를 새로운 세계로 안내했다.
“비밀의 문”을 열었던 그날, 나의 호기심은 위험을 넘어 특별한 인연으로 이어졌다.
그 경험은 나를 한층 더 성장하게 했고, 지금도 그날의 화대를 떠올리면 꿈처럼 느껴진다.
한동안 그들과 어울리며 웃고 즐겼지만,
결국 내가 다른 나라로 옮기며 연락이 끊겼다.
그들과 연락이 끊긴 지 오래지만, 가끔 생각한다.
‘어디에선가 또 누군가에게 “비밀의 문”을 열어주고 있을까?’
나를 “비밀의 문”으로 초대해 줬던 남매.
낯선 나라에서 따뜻함으로 가족처럼 대해줬던 그들 어디서든 건강하고 행복하길 기도한다.
“보고프다… 남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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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 북으로 올릴 글을 일반 연재로 발행 해서
다시 올립니다. 독자분들께 죄송합니다.
아침 9시에 발행 예약을
해두었는데 , 한국 시간이 아니라
라오스 9시로 되어서 부랴부랴 올리다 보니
착오가 있었습니다.
시간이 늦어 슴슴한 사과의 글을 첨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