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일 때 가장 빛이 난다
남들과 비교하지 말자 , 나의 얼굴변천사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잘 나가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공부 잘하고 키 크고 얼굴도 잘생긴 친구들이 많았다. 게다가 집도 엄청나게 부자가 많았다. 나는 그 친구들이 부러웠다.
친구들은 대학교수의 아들에다가, 약대학장님의 아들까지 있었다. 어머니가 산부인과 의사인 친구들 얼굴이 하얗고 캔디에 나오는 안쏘니처럼 너무 귀공자 같이 잘 생겼다.
그에 비하여 나는 이빨도 누런색에다가 돌출입이었다. 옷차림도 차이가 났었다. 친구들의 옷차림은 깨끗하고 하루에 2번 샤워를 한다고 했다. 사실 나는 그 당시 몇 년에 목욕을 몇 번밖에 안 하는 목욕을 연례행사로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친구들의 깨끗함이 나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한없이 부끄러웠다.
거기다가 나는 오른쪽 눈에 흉터가 있었다. 어머니가 어렸을 때 눈옆에 다래끼가 났는데 관리가 잘 안 되고 심하게 부어버려 고름을 짜다가 그만 눈이 약간 찌그러지게 되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별일 아니었는데 사춘기가 돼버린 나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어린 초등학교 때까지는 신경이 전혀 쓰이지 않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술집 근처에 살았던 나는 약간 조숙했다. 조숙함에 따라 열등감이 급속적으로 높아져서 눈옆의 상처 때문에 나는 사람을 쳐다보지 못했다. 그리고 얼굴이 빨개져 버렸다.
그것은 지금도 기억으로 많이 약간 남아서 나는 거의 평생 동안 거울을 제대로 보지 못하였다. 용기를 내야 거울을 쳐다볼 수 있었다. 세월은 많이 지나 물론 지금은 사람 얼굴을 제대로 쳐다 보기는 하지만 아직도 과거의 잔영이 남아있다.
나는 친구들과 똑같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기 시작했다. 성공하고 싶어서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그중에서 가장 신경을 쓴 것은 어쩌면 외모에 관한 것이었다.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부모님한테 하면 돌아오는 것은 욕뿐이었다.
"개새끼가 정신 못 차리고, 호강 자강하게 컸는데 뭐가 어떻다고 미친놈, 나가 죽어라!"말하는 부모님과 누나와 형들 때문에 나는 더욱 더 자신감이 없어졌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먼저 가장 큰 핸디캡이라고 할 수 있는 오른쪽 눈의 흉터를 고치기 위해서 갖고 있는 돈을 다 털어 성형외과에 가서 눈꺼풀 부분을 살짝 접는 수술을 했다.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흉터가 잘 드러나지 않아서 좋았다. 많은 성과가 있었지만 하지만 마음의 상처가 있었던 나는 그 수술 뒤에도 자신있게 보지 못하고 약간 사이드로 밖에 거울을 볼 수 없었다.
그 뒤로 나는 조금 자신감이 생겼을까? 하지만 거울을 볼 때마다 나는 마음이 무너졌다. 왼쪽 이마에 커다란 혹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혹은 중삼 때 불량친구들과 게임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강하게 이마를 때리는 게임을 너무 심하게 해서 부어버렸다가 멈춰 진 것이었다. 당시 반에서 노는 상대편 친구는 나의 이마의 한쪽만을 공략했다. 나의 이마는 왼쪽 한 부분만 부풀어올라 다시는 가라앉지 않았다.
중학교 때 어떤 친구들은 나를 과장해서 혹부리영감이라고 놀렸다. 나는 더욱더 열등감에 시달려 이번에는 혹수술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드디어 혹수술을 받았으나 처음에는 수술효과가 거의 없는 혹이 거의 안 들어가서 나는 크게 실망했다. 몇 년 뒤 다시 한번 혹 제거 재수술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의사 선생님이 하는 말이 잘못하면 푹 파여지게 되고 그러면 더 보기 싫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2차례에 걸친 이마수술을 끝내고 보니 이제는 코가 문제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코가 막혀 입으로 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남들은 코로 숨 쉬는 데 나는 코로 숨을 쉬지 못했다. 이번에는 나는 과감하게 동네 이비인후과를 가서 코가 막힌다고 코를 뚫어주는 코내벽을 끓어주는 수술을 하였다. 고통스러운 수술을 마치자 코마개를 빼자 정말 별천지에 온 것 같이 코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몇 개월이 안되어서 원래 복원적인 상태로 들어가 나의 왼쪽 콧구멍은 완전히 막혀있었다. 나는 크게 실망했다.
나는 괴롭고 답답했지만 그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코로 숨을 쉬는 것은 커다란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활하면서 그러다가 이번에는 우연히 얼굴을 자세히 보니까 돌출입에다 위의 앞이빨이 완전히 벌어져 있었다. 보기가 아주 흉했다. 옛날부터 앞니가 벌어지면 복이 나간다고 했는데 앞니가 완전히 벌어져 있었다.
그래서 또 과감하게 40살이 넘어서 교정을 하기 시작했다. 교정은 500만 원이 넘어가는 고비용이었다. 하지만 나는 직장을 다녔기 때문에 용기를 내었고 나는 양심이 있어서 이번에는 아들과 딸 함께 교정을 시작했다.
나이가 들어서 하는 교정은 효과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실망했다. 그래도 더 나빠지지 않고 앞니가 붙어있는 것처럼 보이니 나름대로 성공이었다. 아무튼 교정의 효과를 많이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다시 많이 안정이 되니까 이번에는 다시 코수술에 도전하려고 하였다. 좀 더 큰 병원에 코 뼈를 깎아내는 수술을 하기로 하였다. 나는 용감하게 혼자 입원해서 주말에 도전을 하였다.
하지만 수술을 위한 여러 가지 검사를 사전에 하기 시작했다. 그 검사 중에는 후천적 면역결핍증 검사도 있었다. 코수술을 위하여 사전검사를 천천히 기다리던 나에게 후천적 면역결핍증의 가양성 반응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아무러 상식도 없었던 사망선고와 같은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렇게 절망하였고 사실이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건가 하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분별한 성적 행위는 전혀 없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냐 하고 당황해했다. 다시 확실한 결과를 위해서 검사를 하고 2주일 동안 기다리기 시작했다. 나는 거의 이주동안 죽음의 문턱에 서 있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몰래 눈물을 흘리며 아들과 딸에게는 이제 아빠가 죽을병이 걸렸다고 했다. 아들은 관심이 없는 표정을 지었고, 오직 딸만이 무슨 병인지는 모르지만 의술이 좋아졌으니 걱정마라고 했다. 나는 거의 서서히 삶의 의지를 놓고 있었다.
어느덧 이주가 되어 병원을 갈 때가 되었는 데 걱정이 되어서 잠을 못자다가 하루를 먼저 병원에 비장한 마음으로 가 보았다. 결과를 물어보니 간호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음성이네요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너무 자연스러운 말투에 나는 더 놀랬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세한 검사 시 가양성이 나와도 그렇게 안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겨우 삼백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니 그러한 확률의 초기 사전검사를 왜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
아무튼 나는 코수술을 무사히 치렀고, 오늘에 이르렀다. 왼쪽 콧뼈를 깎아내면서 깍은 뼈를 활용하여 코를 약간 높였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의 내가 되었다고 하는데 아직도 외모는 맘에 안 들고 군밤장사 같다.
여전히 괴로워 하면서 어떻게 하면 외모가 멋있어져서 여자들한테 인기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나란 사람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보다. 그 뒤로 얼마 전에 보톡스를 한번 맞았다.
나는 잘 생긴 그 친구들을 닮아가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잘생긴 고삼 친구들 다 뭐 할 까? 나는 지금도 친구들을 닮아가려고 더욱더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긴 세월이 지나고 보니까 깨닫는 것이 있다. 누구나 다 자신의 색깔을 갖고 있었다. 자신의 색깔을 따라서 열심히 살아가면 그만이고 나는 성공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나는 나일 때 가장 빛이 나는 것이다.
학창 시절부터 열등감에 시달리면서 그들을 쫓아가려고 애썼다.
하지만 어느 정도 쫓아갔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은 더 멀리 가고 없었다.
이제는 인생을 돌아갈 나이에서 보니까 아무도 부러워할 필요가 없었다. 죽으면 끝이니까!
그리고 내 인생도 순간순간 소중하니까?
어쩌면 살아있는 매 순간 하나하나가 우리에게는 크나큰 축복 아닐 수 없다.
역시 나는 나일 때 가장 빛이 나는 것이다.
내가 가장 멋있을 때는 나답게 생각하고 자신있게 행동할 때이다.
나는 나일 때 빛이 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