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발표하면 아무도 박수 치지 않는다.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남학생들이 ‘킁킁’ 소리를 내고 웃는다.
모르는 학생이 나를 보며 내 이름을 부르고 주변 친구들과 히히덕거린다.
신고를 했더니 언제부턴가 내 뒤에서 나를 칭하는 것 같은 예명을 만들어
더 잔인하게 나를 물고 뜯는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 차라리 무릎이라도 꿇고 빌 텐데, 그냥 내가 싫단다.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고양이들이 가지고 노는 쥐일 뿐이다.
숨고 싶은데 교실에서는 숨을 곳이 없다.
엄마는 학교에 가서 그냥 무시하고 버티라고 한다.
담임은 수업시수를 채우지 못하면 유예된다고 한다.
밥이 넘어가지 않고, 잠이 오지 않는다. 침을 삼킬 힘조차 없어
정신과에 끌려 간다.
정신과 의사는 약을 먹으면 좀 나아진다고 한다.
교실에 들어갈 수 없어 위클래스로 끌려 간다. 힘들겠다고 위로해준다.
그 학생들이 내 인생에 중요하지 않고,
나와 내 미래를 위해 해야 할 것에 집중하라고 한다.
그 애들을 무시하지 못하고, 교실에서 버티지도 못하고,
내 미래를 위해 그 무엇도 하지 못하는 나는, 실패자이다.
죽고 싶은데 죽지 못하는 나는, 실패자이다.
아무도, 이곳에서 나를 꺼내주지 않는다.
죽고 싶다.
학생들이 다 가고 조용한 금요일 오후, 위클래스 문이 열렸다. 초등학교 5, 6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듯한 작은 키, 앳된 얼굴에 화장을 과하지 않게 한 여학생이 상담을 요청했다. 친구 사이의 관계 갈등이라 하기엔 잔혹했고, 버티라고 하기엔 가혹했다. 병조퇴라도 편히 하면 좋겠지만 고교학점제 도입으로 수업 일수가 적으면 유예가 된다. 학교를 빠지는 것 자체로도 불안한데, 시험은 다가오고, 공부는 안 되고, 내신 망하면 대학을 못 간다는 불안이 학생의 마음을 압박했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를 듣는데 학원에 가야 한다며 무거운 가방을 들고 위클래스를 나갔다. 그 뒤로 몇 주정도 교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위클래스로 찾아왔다. 화장기는 사라지고 모자와 마스크로 꽁꽁 싸맨 학생은 시든 제비꽃 같았다.
"아니 왜 그걸 못참아. 그냥 무시해. 인생 망할래?" 엄마의 이 말에 아이는 참지 못한, 실패한 자신을 질책했고
"그 학생들의 눈빛과 뒷담이 실제 너를 다치게 하지 않아. 누군가 너를 미워하는 것이 네 삶을 무너트리지 못해." 라는 나의 말은 그 아이의 마음에 닿지 못했으며
"두려움과 불안에 집중하지 말고, 다른 감각에 집중해보자." 심호흡과 신체 안정화 작업을 알려주고, 새콤한 캔디를 먹게 하고, 말랑이 인형을 쥐어 줬음에도, 학생은 여전히 교실에 들어가지 못했다.
어떤 학생은 학교에서의 뒷담화와 거절의 눈빛들이 아프고 힘들지만, 고양이 똥으로 치부하고 견디며 자신이 해야 할 것을 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집중한다, "그 학생들의 눈빛과 뒷담이 실제 너를 다치게 하지 않아. 누군가 너를 미워하는 것이 네 삶을 무너트리지 못해." 이 말에 힘을 얻어 학교에서의 삶을 견뎌낸다.
그런데, 왜, 이 학생은 교실에도 들어가지 못할 만큼 두려움을 느끼고, 시든 꽃이 되었을까. 오래 전 읽었던 '정서적 고통에 대한 뇌의 반응체계' 기사가 생각났다. 신체적 고통을 느낄 때 배후측 뇌섬염이 활성화되는데 정서적 고통을 느낄 때도 동일한 영역이 활성화 된다는 것이다. 정서적 고통을 유발하는 상황을 신체적 손상 같은 '위협'으로 인지한다는 말이다.
아차. 팔, 다리가 잘려나 갈 위협을 느끼는 학생에게 '무시'와 '심호흡'이 통할리가 없지.
(물론, 기질적인 요인, 성장환경, 과거 교우관계, 현재 스트레스 상황의 강도 등 여러 이유를 고려해야 한다.)
묻고 싶다. 고양이 앞에 있는 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팔, 다리가 곧 잘릴 것 같은 이 학생에게 무엇을 해줬어야 할까. 어제 나는 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 우리 전학 가자. 학교도 좀 쉬자. 숙려제 써도 되고, 체험학습 써도 괜찮아. 고교학점제 이수 못 해도 보충수업 들으면 돼. 걱정하지마. 너 학교 좀 안 나간다고 인생 안 망해. 인생 망한다고 누가 그래?"
엄마는 아이가 학교에서 버텼으면 좋겠다. 여러 영상 매체에서 "회피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아요. 마음 근육을 키우며 두려움과 불안을 다스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말하니, 학교를 가지 않는 내 자녀가 혹시나 다음에 찾아 올 고난 앞에서 또 다시 회피할 것이 걱정된다. 회피하지 말라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은 폭우가 쏟아지는 곳에 무조건 눌러 앉아 온 몸로 비를 맞으라는 소리는 아니다. 우산도 써야 하고, 피할 나무가 있으면 잠시 피하기도 하고, 쏟아지는 빗속에서 친구와 수다도 떨 수 있다.
마음이 곧 무너질 것처럼 갈라진 사람에게 그 상태로 견디라고 말하는 것은 무너지라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얼마나 갈라졌는지 살펴보고 물도 적셔주고 모래나 흙으로 좀 채운 후에 발로 다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잠깐 고통의 자리에서 벗어나도 좋다고 말해주고 싶다. 조금은 안전한 장소에서 안전한 사람과 지금 내가 얼마나 아픈지,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는 진짜 이유인지, 내 문제인지, 환경의 문제인지를 살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과 해야 하는 것, 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아직 단단한 곳 –미래, 꿈, 소중한 사람, 성격의 강점 등-을 확인하고 지금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있음을 깨닫도록 도와줘야 하는 것이다.
"깨진 마음을 바라보도록,
위협이 없는 안전기지에서 자신을 살필 수 있도록,
무너질 것 같은 너에게 잠깐 시간을 내어 주는 넓은 아량이 있기를"
나 스스로에게 말하며, 내일 위클래스로 올 학생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