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의 자유.
개인이 처한 어떤 환경이나 상태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어떠한 상태에 대해 개인이 취할 수 있는 태도에 대한 자유
나치수용소. 우리는 그곳이 얼마나 잔혹했으며 고통스러웠는지 알고 있다.
‘삶’이라 부르기도 처참한, 생존을 위해 매분 매초 발 끝에 있는 힘까지 끌어 올려야 하는 사람의 얼굴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빅터프랭클은 수용소 안에서 깨진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하는 사람을 보며, 인간이 가지는 ‘의지의 자유’에 대해 생각했다.
작은 한국, 그 안에 있는 작은 학교, 더 작은 상담실에 있는 나는,
깨진 마음으로 인해 삶의 의지를 잃은 얼굴을 바라본다.
그럼에도 배가 고파 밥을 먹는 아이들의 '생존하기 위한 의지'에 대해 생각한다.
생존하기 위한 의지라도 있는 아이들이 그저 고맙다.
그럼에도 나는 이 아이들이 고통의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한 의지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좋은 것을 해주기 위해서도 ‘의지’를 사용했으면 좋겠다.
고통이 나에게 주는 의미와 성장에 대해선 차차 생각해도 좋으니,
아픈 나를 위해 좋은 것을 해주는, 자기 자신에게 ‘엄마’가 되어주면 좋겠다.
학생들을 앉혀놓고 ‘의지의 자유’를 논해보고 싶으나,
“샘 무슨 개소리에요.”라는 눈으로 바라볼 것을 상상하며, 씹기 어려운 고기 대신 부드럽게 삼켜지는 소시지를 준다.
“넌 뭐할 때 아무 생각이 없어져?”
아이들은 단번에 ‘핸드폰이요.’ ‘자는 거요.’ 라고 말한다.
“그치, 그게 짱이지.”
빅터프랭클의 의미치료에서는 반성 제거(탈숙고)라는 기법을 사용한다. 내담자가 과도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에서 벗어나 좋아하거나 의미 있는 것을 하면서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사고로 전환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학생들에게 반성 제거를 시도해본다.
노래듣기, 걷기, 마라탕먹기, 중학교 친구랑 수다 떨기, 지하철 타기, 그림그리기, 올리브영 가기.
“오. 올리브영? 그건 생각도 못했네. 샘은 다이소를 가.”
그렇게 찬찬히 마음 안식처를 찾아본다.
“샘은 어릴 때 혼자 있으면 책을 보거나 껌종이의 은박지를 떼어 내서 작은 인형을 만들었어. 넌?”
“그냥 티비 봤는데요. 놀이터에 나가 있기도 했고...아. 보석 십자수도 했고, 슬라임 만들었어요.”
“오. 슬라임. 그거 만지면 불안이 내려간대.”
“...”
“있지, 뇌는 부정적인 것만 기억하려고 해서 어른이 되어서도 나한테 즐거운 놀이를 해주래. 뇌가 –아 즐거운 것을 하고 있구나.- 기억하도록.”
“...”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아 아이 안에 있는 삶의 의미, 생존을 위한 의지가 아닌, 기어코 학교에 나오려는 의지 말이다.
“너는 이렇게 힘든데 왜 자퇴를 안 했어?”
“사람 구실이라도 하려구요.”
“학원은 왜 가는건데?”
“핸드폰 하는 것보단 낫죠. 뭐라도 해야하니까요.”
“학교에 오는 것이 힘들지만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되려고 뭐라도 하려는구나.”
“...”
“학교가기 싫은 마음, 짜증나는 마음에 힘을 실어주지 말고,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네 의지에 힘을 실어주자”
“그러고 싶은데 잘 안 돼요.”
"그래.. 알아. 그게 그렇게 쉽지 않아. 샘도 참아내느라 두통을 달고 살았어."
"..."
"탈모는 없어?"
"탈모는 없어요."
"야. 샘은 탈모도 왔잖아. 너 탈모 안왔음 진짜 다행이다. 다른 건 몰라도 머리카락은 지켜라."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이 잠깐, 고통을 잊게 해줬으려나...
불구덩이 속, 침몰하는 난파선 속이 아니라면
잠깐 나를 위해 좋은 것을 선택해주자.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안식처에 잠깐 들어가는 것은 고통속에서도
작은 행복감을, 만족감을 느끼게 해줄 것이며,
존엄성을 지닌 가치로운 존재임을 스스로에게 증명해주는 것이다.
나치수용소에서 면도를 했던 그 남자의 얼굴이 궁금하다.
가끔은, 시답잖은 농담을 건내며 피식 웃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