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마스쿠스 Jul 13. 2024

식모살이

내가 네 집 식모냐고 쏘아붙였다. 

식모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엄마가 장사를 하고, 도우미 아줌마를 쓰다가 아줌마가 그만두게 되고 나서 외할머니가 우리를 돌봐주신 지 5년쯤 되서였다. 

"내가 너네 집 식모살이하는 거지 뭐..." 

라며 외할머니는 한탄하듯 어느 날 한숨을 쉬었다. 사춘기 때 할머니와 싸운 후 어쩌다 나온 말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들은 것은 남편의 외할머니가 어느 날 우시면서 "내가 평생 이 집 식모살이를 했다"라고 하소연하셨을 때였다. 이민 와서 30년 넘게 딸의 살림을 돌보아주신 할머니였다. 


그리고 세 번째는 남편이 아무 데나 벗어놓은 옷가지를 치우며 투덜대던 내 입에서다. "내가 네 집 식모냐.. 양말 좀 빨래통에 잘 넣어!!!!" (결혼 8년 차 아직도 양말을 종종 집어 들어야 한다.)


태어나 한 번도 남의 뒤집어진 양말들을 빨래통에 수거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름 귀하게 크면서 빨래 돌려본 적도 없이 살다가 유학 가서 스스로 모든 것을 해나간 것은 맞지만 나 말고 다른 다 큰 어른의 아침도 신경 써줘야 한다는 것도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그럼 결혼 전에는 뭐 누가 챙겨줬나? 다들 자취하고 살아가는데 왜! 결혼하면 부인이 챙겨줘야 하는 것인가. 왜 나만, 나만... 이러면서 피해의식이 커져만 갔다.

이민을 오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덜컥 임신하여 출산했다. 딱 13개월 만에 뉴욕에서 파라과이로, 커리어우먼에서 살림과 육아만 하는 아줌마로. 내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그리고 그렇게 바뀐 내 인생이, 내 모습이 괜찮다고, 자연스러운 고민이고 힘듦이라고 토닥여주는 유일한 존재인 친정아버지도 내 옆에 안 계신다. 카톡으로만 연락할 수 있는 아빠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엄마는 그 당시에도 바쁘셔서 거의 이야기를 못한 것 같다. 


나는 덩그러니 혼자 남아 남편이 출근하면 밤새도록 이어오던 육아를 아침에 이어서 또 했다.

젖먹이인 큰아들을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은 채 오로지 혼자 10개월까지 키웠다. 살림 또한 아무 도움 없이 생짜로 혼자서 해나갔다. 많은 사람들에게 당연한 이 일이, 피해의식과 우울감, 익숙해지지 않는 살림과 요리가 커다란 피해 감으로 똘똘 말린 커다란 실타래로 시속 180킬로쯤으로 굴러와 내 몸을 짓눌러왔다. 


그 와중에 10주 정도 받을 수 있던 과외는 달디 단 꿀같았다.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내 나이또래의 파라과이인의 선생님 바네사는 당시 넷째 임신 7개월 중이었는데 출산 전까지 내 스페인어를 도와주었던 것이다. 일주일에 두 번 한 시간씩 그녀를 손꼽아 기다렸다. 누군가와 버벅거리지 않고 말을 할 수 있다는 소통의 자유가 주는 행복을 마음껏 누리고 언어를 연습하는 그 시간에 나는 100일을 갓 넘기고 범보의자에 앉아 빙글거리며 나와 선생님을 보고 웃던 첫아들을 보며 더없이 행복하게 웃을 수 있었다. 


식모 같은 삶이었지만 나는 주부다, 내 일이다, 라며 서서히 나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니, 받아들이지 않음 내가 미칠 것 같았기에 머리에 입력에 입력을 반복했다. 

 


이전 14화 스페인어는 또 처음이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