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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다올 Oct 10. 2024

푸른 노을 지는 환희령

환희령으로 가는 길

엊그제 이곳에서 푸른 노을을 보았는데 푸른 노을은 지고 짙은 숲이 노을을 감춰버렸다. 잎사귀 색깔이 변하기 시작했다. 북한산 최고의 단풍나무 군락지 환희령에도 가을이 찾아왔다.

환희령으로 가는 길은 북한산성 계곡의 수문터와 민지암, 칠유암, 향옥탄을 지나 범용사 이정표에서 국녕사 샛길로 접어든다. 시작은 오르막이나 단풍나무와 참나무가 우거진 완만한 오솔길이 나오고,  끝자락 나무 데크 다리 아래로 백 척이 넘는 폭포가 너럭바위를 타고 무심하게 흘러내린다.


   폭포 기슭에는 산딸나무가 무리를 지어 하얀 십자가 모양의 꽃받침과 가시관처럼 생긴 꽃술 대신 우뚝 솟아 오른 자루 끝에 딸기처럼 생긴 초록 생명의 열매를 매달고 있다. 산딸나무는 예수님이 이 세상 모든 죄를 대신해서 짊어지고 가던 십자가 나무라고 한다.

가파른 돌계단을 지나 거친 돌부리와 성긴 오르막 너덜길을 지나면 엷은 미소를 머금고 가부좌를 틀고 있는 국녕사 대불이 나그네를 맞이한다.

불상을 지나 계단참에서 약수 꼭지를 틀고 물 한 잔, 그리고 수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노란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노가목에 취해 한참 바라보다 다시 갈 길을 나선다.


   사찰 계단을 내려와 대불 옆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국녕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북한산성과 주능선을 전망하기에 좋은 쉼터가 나온다. 원효봉과 영취봉 너머 파랑새능선과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이 서슬 퍼렇게 버티고 서 있고, 능선을 타고 내려온 용맥이 멈춰 선 곳에 터를 잡은 중흥사, 부황사, 태고사, 상운사의 대웅전과 앞마당이 보인다. 절간의 골짜기마다 물꼬가 트이고 가느다란 물줄기는 하얀 선을 그리며 물고기 떼가 모여들듯 한천으로 모여든다. 마르지 않는 물줄기는 불가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해주려고 개천을 따라 세상 속으로 여정을 한다.    


   오르막 길에는 의상봉과 용출봉으로 가는 갈림길 표지판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 어느 쪽으로 가든 능선에 올라서면 별반 차이가 없지만, 데크 계단이 있는 의상봉 길로 산성 성벽을 따라 운치 있는 능선을 조망하면서 걷는다.

오른쪽은 의상봉 암릉지대가, 왼쪽에는 용출봉으로 가는 철주 쇠밧줄 난간이 기다리고 있다. 성곽길에서 용출봉 암릉지대 쇠밧줄을 움켜쥐고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직벽에 가까운 바위를 밟고 올라서니 북한산 능선과 봉우리 절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서너 평 되는 용출봉 정상은 표지석과 안전선이 쳐져 있고, 사방이 낭떠러지이나 소나무가 가장자리를 에워싸고 있어 생각보다 공포심은 훨씬 덜어진다.  


자명해인대(紫明海印臺) 소나무

용출봉에서 가파른 내리막 철계단을 내려오면 처음 만나는 암릉지대에 키 작은 소나무 몇 그루가 자라고 있다. 바위 틈새에 자라고 있는 유난히 푸르디푸른 소나무와 파아란 하늘,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나.

나의 어휘력과 지식의 부족함인지 아니면 표현할 언어가 없는 것인지 도대체 이 풍경을 어떻게 형용해야 할지 모르겠다.

시인이 아니더라도 여름날 초록 이파리보다 짙고 계곡의 쪽빛 물보다 푸르고 에메랄드빛 바다보다 파란 소나무와 하늘을 말이다. 그냥 눈이 시리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용출봉 소나무와 하늘)

  

   철계단 아래 두 번째 암릉지대 너럭바위에 서서 사방으로 펼쳐진 북한산 능선과 계곡을 바라보니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경외감마저 든다.

내려오면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혼자 보기에 너무 아까워 눈에 담고 카메라에 담고, 절벽에 자라는 마가목 노란 열매도 담으면서 시월에 오리라, 붉은 단풍이 바위를 뒤덮으면 그때 다시 오리라. 모진 비바람과 인고의 세월을 견뎌온 저 소나무, 청초하면서도 늠름한 기상을 잃지 않고 서 있는 그 모습, 마침 하늘도 비가 온 뒤 맑고 파르스름한 비췻빛을 띄고 있어 하늘 캔버스에 소나무와 바위가 그려진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새삼 자연으로부터 인생의 지혜를 배운다.    

        

   의상능선의 용혈이 맺혀 있는 곳, 북한산 모든 봉우리 조망이 가능한 자명해인대(紫明海印臺), 암릉을 내려와 돌아서 보니 바위에 새겨진 다섯 글자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자명해인대는 산자수명(山紫水明) 해인삼매(海印三昧)의 줄임말로 산은 단풍이 들어 붉고 물은 맑으며 깨달은 부처의 마음과 같이 고요하여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다 보이는 곳이라는 뜻이다.

반석에 앉아 북한산 절경과 함께 세속의 모든 번뇌가 사라진 부처의 지혜를 얻고자 조용히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긴다. 산자수명은 출처가 명확지 않은 고사성어이나, 해인삼매는 화엄경에 나오는 글귀로써 불가에서는 마음에 삼라만상이 모두 다 비친다는 이라고 한다.    

 

   자명해인대 아래 길목에 있는 기암괴석 할머니 바위. 사람의 얼굴인 듯 동물의 그림자인 듯, 옆에는 물개 바위가 촐랑거리며 어미에게 먹이를 달라고 조르고 있는 것 같다.

때 묻지 않는 자연유산의 파노라마를 원효봉과 영취봉에서부터 삼각산 주능선을 포함하여 사모바위와 비봉, 응봉능선 너머 웨딩바위까지 동영상에 담는다. 건너편 깎아지른 직벽엔 광물질이 빗물에 씻겨 내린 듯 시퍼런 녹물이 눈물처럼 흘러내린 흔적이 있고, 환희령 나월능선의 용머리는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고 있는 것 같다. 이곳에서 기념사진 몇 컷을 남기고 고갯마루로 내려선다.     


곡선미가 아름다운 환희령

다음 봉우리인 용혈봉을 오르기 전에 소나무를 부여잡고 뒤돌아서서 용출봉 암릉지대를 다시 바라본다. 어떤 말로도 글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동과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사진 몇 장을 더 찍고 습작 노트에도 글을 남긴 후, 용혈봉 계단을 오른다.

용혈봉 정상에서 곧바로 내리막 길로 내려서면 다시 오르막에 증취봉 암봉이 앞을 가로막는다. 암봉을 돌아 너럭바위 전망대에 서면 북한산 4대 명승지 중의 한 곳인 환희령(懽喜嶺)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부왕동암문과 나월능선을 축으로 고갯마루의 좌우를 환희령이라 부르며, 기암괴석과 소나무, 단풍이 아름다운 곳이라 예로부터 조선의 시인묵객들이 환희령의 가을을 특히 사랑했다고 한다.     


   환희령 나월능선의 곡선미는 날렵한 한옥의 기와지붕처럼 빼어난 예술미를 자랑한다. 환희령으로 내려서니 단풍나무가 하늘을 가려 해가 들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다. 부왕동암문에서 바깥을 보니 홍예문이요 안을 바라보니 암문이라, 어느 시인이 이를 보고 시상이 떠오르지 않겠는가!

조선의 옛 선비들은 도포자락을 허리춤에 둘러메고 이곳을 찾았으리라. 고려 임금 현종이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있을 때 환희령 고갯마루 너머에 있던 신혈사 스님의 기지로 목숨을 건진 적이 있어, 왕을 도운 계곡이란 뜻으로 부왕동(扶王洞)이라 명명하고, 암문을 부왕동암문(扶王洞暗門)이라 부른다. 한자도 扶王洞(부왕동) 또는 扶旺洞(부왕동)으로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어 혼란스럽기도 하거니와 본래의 의미가 변질될까 봐 염려스럽다.     

(나월능선 초가을)


   부왕동암문 옆에 성랑지 터와 여장(女墻)에 대한 안내문이 서 있다. 성곽의 성랑지는 산성을 지키던 병사들의 초소이고, 여장은 성벽의 몸체 부분 위에 설치한 낮은 담장이다. 여장을 살받이 터라고도 하며 성을 지키는 병사를 보호하고 적을 관측하거나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었는데, 여장에는 대개 총안(銃眼)이 있다.

적에게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도록 성벽 여장에 나있는 구멍을 비스듬하게 뚫어 성벽 가까이 접근한 적을 공격할 수 있게 만든 근총안과 수평으로 뚫어 멀리 있는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게 한 원총안이 있다.

북한산성의 여장은 남한산성이나 다른 성의 여장과는 달리 독특하게 적당히 다듬은 할석(깬돌)으로 쌓았다.    


부황사와 청하동문

환희령 고갯마루에서 부황사로 가는 내리막 길에는 단풍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이파리가 하늘과 땅을 가려 오색이 현란하다. 북한산에서 가장 기운이 센 곳에 자리한 도량, 부황사(扶皇寺)는 풍수지리에 따라 부(扶) 자가 좌우로 뒤집혀 있는데, 오른쪽에는 백운대가, 왼쪽에는 손으로 감싸는 듯한 나월능선이 절을 에워싸고 있다.

사찰 평상에 앉아 좌청룡 나월능선과 우백호 삼각산을 거느린 명당의 기운을 받으면서 명상의 시간을 가져본다. 절 뒤에는 임금의 한약탕제 물을 길어오던 어정(御井) 약수터가 있고, 거북이 형상의 머리 위에는 유선대(遊仙臺)가 있다. 사찰 이름도 한자가 각기 다른 부왕사(扶王寺, 扶旺寺)가 아닌 부황사로 통일했으면 좋겠다.

   

   부황사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큰 바위에 청하동문(靑霞洞門) 각자 바위가 서 있다. 청하(靑霞)는 푸른 노을을 일컫는데, 여름날 나뭇잎이 무성한 이 계곡에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면 이파리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오색 찬란한 빛이 마치 노을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이다. 푸른 노을은 쑥물빛이다.

어찌 이런 시구(詩句)를 생각해 낼 수 있단 말인가! 하늘을 보니 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잎사귀를 비집고 햇빛이 들어와 마치 푸른 노을이 지고 있는 듯하다, 자하문에 붉은 노을이 지듯이. 청하동문 아래에는 영친왕의 보모이자 김천보통고등학교 설립자인 최송설당의 각자 바위가 있다.      


   최송설당 바위를 지나 산영루 징검다리가 보인다. 바윗돌에 여럿이 둘러앉아 탁족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여독을 풀 겸 해서 신발을 벗고 발을 계곡에 담근 채 옛 선비들이 탁족을 하면서 풍류를 즐겼듯이 필자도 탁족을 하면서 환희령 풍경과 여정을 돌아보면서 꼼꼼하게 기록을 한다.

언젠가 또다시 이 길을 오게 되면 여름이 아니라 단풍이 물든 가을에 오고 싶다. 환희령의 핏빛 단풍과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을 눈으로 가슴으로 글로 옮기고 싶다.

(청하동문 가을 단풍)


   다산 정약용이 삼십 대 젊은 시절에 벗들과 가을에 북한천 산영루를 다녀간 시를 여기에 옮긴다.     


“바윗길 끊어지고 시야에 드는 아스라한 난간, 겨드랑이 맑고 시원하여 날개 돋을 듯하다.

십여 절 종소리 잦아들어 가을도 저물고, 온 산 나뭇잎 노랗고 물소리 차가워라.

숲에 말을 매어 두고 이야기꽃 피우는데, 구름 속 만난 스님은 대우가 넉넉하다.

해 지자 아슴아슴 안개가 푸른 산 가두는데, 행주에선 벌써 술상 올린다 알려오네.”      


   이 글을 읽고 보니 묵은지 닭볶음탕에 소주 한 잔이 생각난다. 오늘도 구파발 래미안아파트 버스정류장에 있는 단골 맛집 '이모네 밥상'으로 간다. 벌써 군침이 돈다.



[참고 자료]

북한산성 안내문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해인삼매론(海印三昧論), 신혈사(神穴寺))   

       

[산행 안내]

<산행코스> 북한산성 탐방지원센터-무장애탐방로-범용사-국녕사-환희령-부황사-산영루-북한천

<산행거리> 8km, <소요시간> 4시간, <난이도> 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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