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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인형 May 19. 2023

그녀의 이력서

재회

취업을 하는 것만 어려운 줄 알았는데 일할 사람을 구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당연한 얘기지만 요구하는 업무를 해낼 자격과 능력을 갖춘 이들의 요구조건과, 직장에서 제시하는 조건 간의 간극이 크면 클수록 공백의 시간은 길어지기 마련이다.


혹시 지난번 그 선생님 어떻게 되었을까요?

네? 또 번복하셨어요?

제발 사람 좀 구해 주세요...... 이러다 저도 지쳐 떨어지겠어요......


만 4세 부담임 자리가 공석이 된 지 벌써 4주째,

선생님들이 교무실을 오가며 호소와 협박(?)을 늘어놓을 때쯤, 한 통의 이력서가 도착했다.


음......

일단 정교사 자격이 있으시고, 오래전 이긴 하지만 담임교사 경력도 있으시고.

나이가 많으셔서 선생님들이 어려워할까 봐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것 빼고는 나쁘지 않다.

나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어 면접 약속을 잡았다.


......


"안녕하세요, 김 oo입니다...... 처음 뵙겠습니......"

"어서 오세......?"


진홍색 상의와 흰 바지를 화려하게 차려입은 선생님이 나의 책상 앞으로 안내되었을 때 우리는 서로 인사말을 건네다 잠시 머뭇거렸다.

눈가에 주름이 내려앉긴 했지만 저 화사한 표정과 쾌활한 말투가 어딘가 익숙했다.


"김 oo선생님."

내가 책상 위에 놓인 그녀의 이력서를 들어 다시 찬찬히 살펴보는 동안, 김 선생님도 무언가를 떠올린 것 같았다.


"막내 선생님?"

"김 선생님......!"


어머.

평생 동안 담임 따까리나 하라며, 험한 말을 퍼부어대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잘 지냈어요? 와...... 이렇게도 만나네."

"그러게요, 선생님. 그때 결혼식에 못 가봐서 죄송했어요."

"그랬나? 난 기억도 안 나는데. 아직도 성격 그 대론 가봐?"


면접 자리라는 것을 망각한 듯, 김 선생님은 어느새 슬며시 말을 놓았다.


분명 나도 뭘 잘못했겠지...... 하지만 상황은 잊었어도 그녀에게서 받은 모진 말들은 가슴속에 깊이 남아 이렇게 불쑥 기억이 나버린다는 거다.


"역시 대단해. 여태 한 번도 안 쉬었다니. 옛날 생각난다. 여기서 또 같이 일하면 좋겠다. 우리 집도 가깝고."

김 선생님은 정말 모든 걸 잊은 사람처럼 내 손을 꼭 잡아 흔들었다.


......


김 선생님이 손을 흔들며 돌아간 후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결혼 이후 바리스타 자격증, 심리상담사 1급 자격증도 취득하고 학습지 교사, 단기대체 강사, 특성화과정 강사, 누리보조활동도 틈틈이 했구나.

아이들도 어느 정도 컸고 안정적인 직장이 필요하겠다...... 싶다가도.


기분에 따라 막말로 닦달하고는 며칠 동안이나 그 일에 대해 꽁하고 있는 것은 단지 '너의 성격 탓'이라며 억울해하던 김 선생님. 

결혼 전날에는 무엇이 심기에 거슬렸는지 손가락으로 내 어깨를 쿡 쿡 밀어대던 일. 나는 밤새 울어 퉁퉁 부어버린 얼굴로 축하받을 자리에 도저히 갈 수가 없어서 축의금만 보냈고 그날 이후 일은 말하고 싶지도 않다.


강산이 두 번도 넘게 변하도록 많은 시간이 흘렀다.

누군가에게는 별거 아닌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고 웃으며 함께 일할만큼 난 아직 큰 사람이 못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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