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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여 Mar 01. 2022

삼월에 만나는 삼삼한 K 할머니

유튜버 할머니에서 시니어 모델 할머니 그리고 영화 미나리 속 할머니까지 K 할머니의 활약상이 눈부신 요즘이다. 일본 공항에서 “사인이노?”하라고 하자 “사위가 아니고 아들한테 왔다.”라고 애절한 눈빛을 보내던 외유내강 할머니, 공부로 지친 딸을 위해 바리바리 싸간 고추장과 된장, 김치가 미국 공항에서 반입이 안 된다고 하자 “너희들은 고기 먹고 힘내지만 우린 고추장, 된장 힘으로 사는 겨.”라고 당당하게 외치던 열혈 할머니, 형형색색의 자투리 천들을 모아서 상보와 방석 커버를 뚝딱 만들던 패치워크의 대가 할머니, 손주들 용돈이 궁해 보이면 ATM 기기처럼 지폐 몇 장이 나오던 쌈지 주머니를 찬 걸어 다니는 뱅크 할머니, 언제나 결말을 못 듣고 잠이 들게 만드는 수면제 같은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나오는 화수분 이야기꾼 할머니, 알사탕과 비스킷, 곶감과 약과 등 맛난 것들이 계속 나오는 열려라 참깨 수납장을 관리하는 할머니, 한글을 못 깨우친 손주가 엄마에게 혼나자 “학교 가기 전 찬 바람 불면 글자 다 읽으니 너무 닦달하지 마라.”라고 훈계하는 참교육 할머니, 온돌방에서 메주를 만들어 띄우고 육포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보여주면서 무슨 음식이든지 시간이 걸려야 제맛이 난다는 음식 칼럼니스트 할머니, 마당 하수구에도 생물이 사니까 뜨거운 물은 버리지 말라던  환경 운동가 할머니, 미나리나 대파 뿌리를 화분에 심은 뒤 자랄 때마다 잘라서 먹던 유기농사꾼 할머니, 새벽이면 목욕재계하고 염주를 돌리며 불경을 읽던 불자 할머니까지. 비록 가방끈은 짧아도 생활 경험의 끈은 길고, 지식은 얕지만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으며 터득한 지혜가 깊기에 자식들 키워 내느라 다 써버린 에너지를 내리사랑 에너지로 충전하면서 손주들까지 키우는 K 할머니. 단순히 위대하다, 대단하다는 추상적인 말로는 표현되지 못하는 K 할머니의 정체가 궁금하다. 그 비밀은 복닥거리며 살아온 대가족 제도의 힘이라 생각된다. 밖에 할아버지의 권위가 있다면 그 안의 중심엔 묵묵히 살림을 꾸려가는 할머니의 사랑과 정성이 녹아든 희생이 있다. 그런데 그 희생이 우리에게 연민보다는 자부심으로 다가오는 건 그 희생이 오롯이 가족 공동체를 향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요즘 아이들에게 할머니는 ‘엄마 보다 나이가 더 많은 엄마의 엄마’로 이해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할머니’라는 명사가 ‘우리 할머니’라는 고유명사였던 시절이 그립다. 가끔 식당에서 마주하는 할머니가 아니라 함께 생활하며 공유하는 추억이 많은 할머니가 못내 그립다. 만약 코로나로 인한 언택트 시대로 K 할머니를 소환한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궁금하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무궁무진한 비밀 병기가 쏟아지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우리 아이들이 엄마의 엄마에게 요구할지도 모른다. “할머니도 K 할머니처럼 수많은 아이템으로 우리를 놀라게 해 주세요.”라고. 이제는 할머니가 될 세대들이 K 할머니를 벤치마킹할 때다. 돈이나 말이 아닌 몸으로 전하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 것만으로도 K 할머니의 역할은 충분하지 않을까? 가까운 미래에 삼삼한 K 할머니로 기억되고 싶은 예비 할머니가 따스한 다짐을 해본다, 봄볕이 넉넉한 삼월 오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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