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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창준 Mar 23. 2023

시음(詩飮)


 꿈을 꿨는데 마트에서 시가 티백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한 곽에 스무 개가 들었는데 다 맛이 다르다고 했다 그 앞에서 시인들 몇이 모여 시가 이토록 가볍게 유통되어서는 안된다고 너무 저렴하다고 시위를 하고 있는데 젊은 시인들은 한 쪽에 모여 시라는 게 차 보다는 에스프레소나 라떼 쪽에 가깝지 않냐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티백 보다는 수분이 말끔히 제거된 가루 타입으로 만드는 게 낫지 않냐는 원로 시인의 말에 피켓이라도 좀 만들어야겠다고 몇이 사라지고 대기업 놈들이 이제는 골목상권을 넘어 골방의 시도 넘본다고 몇몇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거칠게 욕을 해댔다 음료회사 직원이라는 젊은 여자가 시는 자고로 따뜻하게 먹는 게 최고라며 시음을 권했고 시음을 하려고 줄 선 사람들은 대부분 노인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첫사랑의 정수리 향이 난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꺼지기 직전의 향냄새가 난다고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모음을 깔끔하게 제거해서 드라이한 자음의 맛이라고도 했다 어쨌든 아무도 사지 않았고 시위를 위해 모였던 시인들도 흩어졌지만 직원이 건네준 시음용 종이컵 안은 비어있었다 입을 대어 보니 새하얗게 비워진 달의 맛이 났다 몹시 추웠던 날 혼자 놀다 운동장 구석의 얼어붙은 철봉에 혀를 대었을 때 나던 그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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