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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정희 Sep 15. 2022

시간을 줘

 총성이 울렸다. 백 미터 달리기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내 앞 줄에 있는 아이들이 달려 나갔다. 그들이 일으키는 흙먼지에 내 시야가 흐려졌다. 이대로 뿌옇게 내가 사라졌으면. 달려야 하는 그 순간을 모면하고 싶어서 차라리 내가 없어지는 상상을 했다. 

 

 “탕!”

 

 내 줄의 아이들이 용수철처럼 튀어나갔다. 내 몸도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중간 지점까지는 어느 정도 아이들과 보조를 맞췄다. 문제는 항상 오십 미터 즈음에서 생겼다. 다리는 무거워지고 등 뒤에서 누군가 잡아당기는 것 같은 힘이 느껴졌다. 다른 아이들이 앞서 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그냥 주저앉고 싶어졌다. 결과는 물론 꼴찌였다.

 

 비단 달리기 뿐만 아니라 각종 운동에 소질이 없던 나는 체육시간이 싫다 못해 무서웠다. 그런 내게 핵폭탄급 시련이 닥쳤으니 바로 체력장이었다. 나는 중학교 내내 4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자전거로 통학할 정도로 건강했다. 고교 진학을 하기 위해 내가 얼마나 건강한가를 보여줘야 한다면 나는 증명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내가 그토록 못하는 것들만을 모아서 내 건강을 증명하라는 것인가.  

 

 체력장에 오래 달리기 종목이 있다는 것은 내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윗몸일으키기, 철봉 매달리기, 백 미터 달리기 등 무엇 하나 시원스럽게 통과하지 못한 나였지만 오래 달리기만큼은 자신 있었다. 누구를 이겨야 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다른 종목에 비해 긴 시간을 주기 때문에 그 안에 내 페이스를 유지하기만 하면 되었다. 시간이 충분하다는 생각은 늘 나를 안심시켰다. 시간을 재면서 그 안에 해내라고 재촉하는 데에 나는 무척 약했다.

 

 같은 반에 순옥이는 나와 키는 비슷했지만 덩치는 훨씬 컸다. 둘이 우유 당번을 하게 됐을 때 나는 순옥이가 힘이 셀 것 같아서 다소 안심이 됐다. 하지만 이층 계단을 채 오르기도 전에 순옥이는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았다. 할 수 없이 나 혼자 우유 상자를 끌다시피 하고 날라야 했다. 순옥이는 조금만 계단을 올라도 무릎이 아프다고 했다.  

 

 어느 더운 날, 그날도 체력장 연습을 하고 있었다. 오래 달리기를 앞두고 두 줄 서기에서 순옥이는 나랑 짝이 되었다. 선생님은 자기 짝과 함께 반드시 완주를 해야 한다는 미션을 주셨다. 체육 실기점수에 반영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으셨다. 다른 종목에서 일찌감치 점수를 까먹은 나는 오래 달리기에서 만회를 해야만 했다. 전의를 다지며 순옥이를 봤다. 착한 순옥이는 마지못해 내 파이팅에 호응을 하기는 했으나 벌써 지친 얼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운동장 두 바퀴를 채 돌기도 전에 순옥이는 기진맥진했다. 순옥이에게 보조를 맞추느라 이미 하위그룹으로 처져 있던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할 수만 있다면 업고라도 뛰고 싶었지만 어찌 나보다 큰 아이를…. 불가능했다. 

 

 순옥이를 독려하는 수밖에 없었다. 달리기라면 꼴찌 자리를 놓치지 않던 내가 졸지에 “헛둘헛둘!” 구령을 붙여가며 순옥이의 조력자가 되었다. 세 바퀴 정도 돌았을까.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며 시간이 다 됐다고 하셨다. 나는 그동안 오래 달리기에서 제한 시간을 의식해 본 적이 없었다. 나처럼 운동감각이 떨어지는 사람도 적당한 속도로 달리기만 하면 거뜬히 통과되었기에, 오래 달리기에서 탈락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보지 못했다. 

 

 선생님과 반 친구들이 주섬주섬 자기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아직 수업 끝 종도 치지 않았는데 체육시간은 끝난 것 같았다. 나는 순옥이를 부축하며 계속 뛰었다. 아니 걸었다고 해야 맞겠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딱히 할 말도 없었다. 그냥 아직 우리의 레이스가 끝나지 않았으니 계속할 뿐이었다. 순옥이도 아무 말 없이 나와 함께 했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레이스를 마치고 우리는 교실로 향했다. 순옥이는 거의 탈진상태로 보였다. 운동장 한쪽에 있는 수도꼭지를 틀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차가운 물이 머리를 적시자 온몸에 찌릿찌릿 전기가 오는 듯했다. 순옥이의 빨갛게 익은 얼굴도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느닷없이 웃음이 터졌다. 

 

 “내가 달리기 꼴찌는 많이 해봤지만 탈락해 보기는 처음이다.” 내 말에 순옥이가 말했다.

 “꼴찌는 맞지만 탈락은 아니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선생님은 반드시 완주하라고 하셨지 몇 분 내로 들어오라고 시간을 정해주진 않았다. 그렇다면 우린 미션을 완수한 것이었다. 주눅 들 필요 없었다. 당당히 교무실로 향했다.


 “선생님, 저희 완주하고 왔습니다.”

 벌써 포기하고 돌아갔으리라 생각하셨던 선생님은 우리들의 방문에 놀라신 듯했다.

 “좋아! 그런데 다음 수업 시작종 쳤어, 이놈들아.”

 후다닥 뒤돌아서는 우리에게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너희들 11번, 12번이지? 실기 합격!”

 

 야호! 터져 나오는 환호성을 속으로 지르며 우리는 교무실에서 나왔다. 복도를 뛰어가며 서로를 보았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순옥이의 마음이 보이는 것 같았다.

 

 ‘우리에게 시간만 넉넉하게 줘봐. 못하는 게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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