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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정희 Sep 26. 2022

오해

 풀잎마다 잠자리가 붙어 있었다. 새벽이슬이 채 마르기 전이라 밤새 풀잎 위에서 잠을 청한 잠자리들이 날개가 젖어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가을 아침, 학교 가는 길에 만나는 그 작은 곤충은 아이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너 나 할 것 없이 가슴과 팔에 이슬 젖은 잠자리를 붙이고 교실 문을 들어섰다.


 수업이 시작될 즈음 성질 급한 녀석부터 날개를 파닥이기 시작했다. 한 마리가 교실 안을 날기 시작하면 덩달아서 다른 잠자리들도 날아올랐다. 내 가슴에 붙어있던 잠자리도 파르르 날개를 떨었다. 그 작은 날개가 일으키는 가는바람이 내 턱을 간질였다.


 그날 아침에도 육 학년 이반 교실 안에 잠자리가 가득했다. 하나둘씩 이슬을 털고 일어나 교실 안을 한 바퀴 뱅 돌고는 창문을 통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한 남자아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잠자리 서너 마리를 낚아채어 손아귀에 넣었다.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는 잠자리들의 꼬리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그 아이는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잠자리를 해칠 생각으로 잡아온 아이들은 아무도 없었기에 우리는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다.


 시골 작은 초등학교여서 우리는 같은 학년 아이들을 얼추 다 알고 지냈다. 그 남자아이는 나랑 세 번이나 같은 반이 되었던 ‘건이’라는 아이였다. 삼 학년 때 나랑 둘이서 술래잡기를 하며 복도를 뛰어다니곤 했는데, 둘이 좋아한다는 소문이 나서 내가 한동안 알은척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복도 창문에 건이랑 내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낙서를 했을 때도 나는 건이 탓인 양 쌩하고 지나쳤는데, 건이는 말없이 낙서를 지우고 씩 웃었다. 건이의 미소가 상한 내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잠자리 사건’은 내 마음에서 건이의 미소를 지웠다. 대신 그를 무서운 아이로 각인시켰다.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건이랑 말을 섞지 않았다. 서로 다른 중학교에 다니면서 삼 년 동안 그의 소식을 들은 적도 없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고향집을 떠났다. 주말마다 집에 다녀올 때면 어머니는 반찬이며 다른 먹거리를 잔뜩 싸주셨다. 나는 그것이 무겁기도 했지만 ‘나 자취생이오.’ 하고 드러내는 것만 같아서 싫었다. 무거운 가방을 터미널에 그냥 버려두고 싶은 유혹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느 비 오는 날, 그날도 내 손엔 짐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터미널에서 표를 사들고 나오자마자 버스가 출발한다고 빵빵 경적을 울렸다. 한 손으로 우산을 펼쳐 든 채 다른 손으로 무거운 짐을 들고뛰어야 했다. 그 상황이 싫어서 내 눈에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늦더라도 다음 버스를 타고 싶었다. 그때 누군가 내 짐을 번쩍 들더니 버스로 뛰었다. 나는 놀라서 보고만 있었다. 버스에 짐을 올린 뒤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건이었다. 잠자리를 손아귀에 쥐었던 그 아이.


 공교롭게도 두 자리가 남아서 우린 같이 앉았다. 고마운 마음보다 창피한 마음이 앞섰다. 그래도 몇 년 만에 만났는데 잘 지냈느냐고 인사라도 해야 하나, 이 아이도 알은체를 안 하는 걸 보면 날 못 알아보나, 그런데 왜 내 짐을 들어줬지? 여러 생각으로 복잡한 심경을 들킬까 봐 창밖만 바라보았다. 하필 같이 앉아서 이 어색한 상황을 한 시간이나 견뎌야 하다니.


 한참이 지난 후 나는 슬쩍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건이는 자고 있었다. 나만 혼자 속이 시끄러웠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드디어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건이는 내 짐을 들고 내렸다. 그냥 두라고 말리고 싶었지만 자기 짐이라도 되는 양 자연스럽게 들고 가는 그의 행동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두 번이나 신세를 졌으니 인사를 안 할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높임말이 나왔다. 건이가 피식 웃었다.  내 얼굴이 또 화끈거렸다.

 “너, 나 몰라?”

 건이가 물었다. 모를 리가 있겠는가. 다만 갑자기 알은체하며 반갑게 인사하기엔 너무 늦어버린 것이었다. 난감해하는 내게 건이는 ㅇㅇ고등학교에 다닌다며 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같은 지역에서 학교를 다니니 다시 보겠거니 했는데 이 년 동안 보지 못했다. 건이는 고향집에 자주 가지 않는지 터미널에서도 볼 수 없었다. 고2 때 내가 다니던 여고와 건이가 다니던 남고가 함께 축제를 준비한다기에 만날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그마저 무산되는 바람에 볼 기회를 놓쳤다.


 주민등록증이 나온 기념으로 동창회를 하자며 초등학교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다 연락이 됐는데 건이만 연락이 안 된다며 아쉬워했다. 건이 아버지가 초등학교 때 돌아가셔서 졸업 후에 이사를 갔다는 것이다. 마을 이장이셨던 건이 아버지는 지붕 개량 공사를 돕다가 사고를 당하셨다고 했다. 나도 얼핏 그 사고에 대해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 사고로 건이가 아버지를 잃은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스무 살 어느 가을날 고향 가는 버스에 올랐다. 평일이어서인지 빈자리가 많았다. 그 많은 빈자리를 놔두고 굳이 어떤 이가 내 옆에 앉았다. 건이었다. 그새 키가 한 뼘은 더 크고 턱밑에 거뭇거뭇 수염도 보였다. 반가운 마음을 그저 ‘안녕’이라는 짧은 단어에 싣고 한 시간을 달렸다. 창밖엔 햇빛에 온 몸을 맡긴 억새가 미풍에 흔들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릴 무렵에서야 나는 건이가 이사 갔다는 말이 떠올랐다. 

 “어디 가?”

 “아버지 산소에.”


 차에서 내려 한참을 걸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그대로 좋았다. 유난히 키 큰 코스모스 꽃잎에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입 맞추고 있었다. 건이의 손아귀에서 발버둥 치던 잠자리가 생각났다. 잠시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서 내가 물었다.

 “아직도 잠자리 싫어해?”

 건이는 무슨 말이냐는 듯 쳐다보더니 이내 내 말뜻을 알아챘는지 씩 웃었다.

 “아버지가 사고를 당한 날 무너진 지붕 위에 잠자리 떼가 날고 있었거든.”

 그랬구나. 진작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미소가 예쁜 건이를 무서운 아이로 생각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갈림길에서 건이와 나는 헤어졌다. 맑은 가을 하늘에 잠자리 떼가 원을 그렸다. 뒤돌아보니 어린 건이가 저만치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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