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맨 만큼 다 내 땅이다
언젠가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이석훈이 하는 인터뷰에서 어떤 분이 나와서
헤맨 만큼 내 땅이다라고 이야기한 것에 깊이 공감했다. 헤맨 만큼 내 땅이다. 인생이 경험을 해야 하는 땅따먹기라면 헤맨 만큼 내 땅인 게 맞고, 그렇다면 나의 땅의 크기는 점점 커져가고 있다는 뜻이겠지.
어느 날 친구가 물었다. 이제 또 프랑스에 가면 머리는 어떻게 할 거야?? 미용실은 한국인이 하는 곳에 찾아서 가??라고 물어보았다. 이전에 프랑스에서 살 때는 어떻게 머리를 관리했냐며. 생각해 보니 나는 프랑스에서 살던 1년 동안 미용실에 간 적이 없다. 그저 한인 커뮤니티에 미용으로 유학 온 유학생들이 저렴하게 잘라주는 글을 보고 요청해서 공원에서 머리를 잘랐던 기억뿐. 그래서 이번에도 미용실 안 가고 혼자 가위로 자르거나 한인 커뮤니티에서 미용 유학생인 분의 글을 찾아서 (마땅한 장소가 없으니) 공원에서 잘라달라고 하려고라고 대답했다. 친구는 나의 말에 감탄했다. 얼마나 많이 경험을 한 거냐며. (만약 동물이 내 머리카락을 먹고 나랑 비슷해진다고 하면 나의 도플 갱어는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 까. 하하) 공원에서 머리가 잘릴 때도 주변 사람들이 와서 구경하고 가고 말 걸고 그래서 오히려 재밌게 모르는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공원 풍경을 보면서 머리를 잘랐던, 나에게는 정말 재밌고 좋았던 기억이었다. 사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어도, 그냥 외국에 있다는 것 이방인이라는 것만으로도 별거 아닌 일들에는 창피하지 않고 용기가 커지는 건 큰 장점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일을 잘하는 사람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만둔다는 결정을 빠르게 내릴 수 있는 사람
가끔 나는 나의 과거를 돌아보았을 때 정규직을 2번 그만두었다는 이유로 나는 책임감이 없는 사람인가라는 자책을 할 때가 있었다. 아무래도 사회가 정해놓은 정상 범주의 틀에서는 벗어난 선택일 수 있기에, 내가 너무 책임감이 없고 끈기가 없나. 내가 문제인 가.라는 자괴감이 문득 나를 괴롭힐 때가 있었다. 그런데 바꿔 생각하면 나는 그만둔다는 결정을 빠르게 내리는 사람인 것이다. 나만의 선이 있고 기준이 명확하기에 그 만족감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것들이 지속적으로 나에게 왔을 때, 놓아버릴 수 있는 용기, 그만두는 선택을 과감하게 하는 용기가 있는 사람.
그게 나였다.
물론 세상을 살면서 끈기 있게 열심히 해야 할 일이 있고 어떤 사람들은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로 최대한 버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틀린 말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도망친 곳에서 나에게 맞는 무언가를 발견하여 사회적 범주의 낙원은 아닐지라도 내 마음의 평화를 주는 작은 농원을 찾을 수도 있고. 또한 끈기 있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한 마리의 새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버드 뷰로 나를 관찰하면, 인생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데 정말 하고 싶은 것들이 욕망이 있다면 그 끈기라는 이유만으로 버티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자신의 우선순위에 따라 선택을 내리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본인이 질 뿐. 어느 누구도 뭐가 맞고 틀리다고 강요할 권리는 없다. 마치 정규직을 그만둔 내가 돈에 있어서는 불안정해졌지만 덕분에 진짜 다양한 일을 하면서 나를 더 잘 알게 됐고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더 잘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물론 정기적이고 안정적으로 돈이 들어오지는 않지만 덕분에 돈을 관리하는 방법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선택에 대한 결과를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다른 것들을 찾아 나서며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삶의 주체성을 갖고 책임감 있게 살아가는 것 아닐까.
3감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자신감, 자존감, 책임감. 감사하게도 사랑으로 키워주신 부모님 덕분에 나는 이 3감을 모두 갖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결정을 하던 옳고 그름의 잣대를 강요하지 않고 자율에 맡겨주신 덕분에 혼자서 자립하는 방법을 배웠고 그 속에서 나는 어디서든 굶어 죽지 않고 살 수 있다는 자신감 그로 인해 튼튼한 자존감의 뿌리를 가질 수 있었다. 원하는 대로 자율성을 주되 범법행위, 몸에 해로운 일,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은 절대 하지 말고 살라는 가르침 덕분에, 나는 나의 행동에 변명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책임감과 퇴사를 하더라도 맡은 것들은 적어도 모두 해놓고 가는 성실함을 배웠다. 덕분에 내가 원하는 것들은 모두 다 성취하면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내가 갈 길을 알고 나를 알고 손에 모두 쥘 것임을 아는. 어느 때보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다. 단단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길에는 꽃길만 있지는 않다. 특히 해외에서 산다는 것은 한국에서보다는 짠내 나고 힘든 생활을 해야 하고 언어장벽이든 행정처리 등 모든 이방인으로의 장벽 앞에서 견고하게 버텨야 하며 억울하고 힘들더라도 번역기를 돌리는 한이 있더라도 내 앞길 내 정보는 내가 찾아야 했다.
인생이 항상 꽃길만 같으면 얼마나 좋으랴
꽃길과 자갈밭을 고루 건넌 사람만이 다음 자갈밭에서 어떻게 살아남을지 알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터널 안에서도 빛을 향해 걸어가는 방법을 안다. 그렇기에 나는 인생이 땅따먹기라면 헤맨 만큼 내 땅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일직선으로 고공행진을 하는 삶이 있는 반면 굴곡이 많은 인생이 있을 수도 있다. 내 삶의 길이 어떤 모양의 형태이든 그 안에서 성장하는 것도 스스로를 믿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도,
결국 나 자신이다.
그리고 터널이 얼마나 예쁘게요.
다리 밑 어두컴컴한 곳들이 얼마나 낭만적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