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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에필로그

새로운 시작

by 낭만찬

새로운 시작



여행을 떠나온 지 1년쯤 됐을 무렵, 우린 ‘그리스 테살로니키’ 지역에 있었다. 그날은 비교적 평범한 ‘여행의 일상’이었다. 그러다 문득 감정이 북받쳐 오르며 운전 중에 눈물이 터져버렸다. 눈물샘에서 눈물이 워셔액처럼 솟아 나오는데 이런 적이 처음이라 나 자신도 너무 당황을 했던 기억이 난다. 옆에 있던 정인이는 티슈를 건네며 운전 중이니 앞을 보라고 ‘전방 주시’를 강조했다. 갑작스럽게 터진 눈물에 서로 놀라 잠시 갓길에 차를 세우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뭐야? 왜 그래? 왜 울어?”

“모르겠어. 그냥 이 순간이 너무 감격스러웠나 봐”


10여 년 전부터 내 소원은 K5 자동차를 운전하며 옆에는 정인이가 타고 있고 즐겁게 드라이브를 하며 우리가 마련한 작은 아파트에서 알콩달콩 사는 것이었다. 너무 소박해 보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그 이상 바랄 게 없다고 생각할 만큼 꼭 이루고 싶은 꿈이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정인이와 외제차를 타고 세계여행을 하면서 드라이브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 소원을 초과 성취한 것 같았다.


사람의 인생에 행운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면 분명 내 행운은 이미 소진된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이에 대해 전혀 불만 없다. 충분히 다 쓰고도 남을 만큼의 커다란 행운이 찾아왔었기에 가능한 날들이었다. 그래서 난 앞으로 펼쳐질 내 삶에 특별한 행운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했더니 조금 운이 안 좋은 순간이 와도 “아 맞다! 나 행운 다 썼지. 그럼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이 들며 마음이 편안하게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건 일상을 살아가는데 매우 큰 변화이자 행복의 포만감으로 다가온다.

사람들이 하는 ‘연애’에 관한 조언 중 하나가 ‘최대한 많은 사람 만나보라’는 말일 것이다. 그 말도 일리는 있다. 우리에게 시간은 유한하고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나에게 맞는 사람을 만나려면 빈도수를 늘리는 게 수학적으로 맞다. 하지만 그 말에는 자칫 함정이 숨어 있을 수 있다. 최대한 많이 만나면서 상대방을 향한 나의 마음이 과연 얼마나 온전해질 수 있을까에 대한 부분 말이다. 여러 사람을 최대한 많이 알아보고 만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마음에 드는 한 사람을 오래 그리고 온전히 사랑해 보는 경험은 또 다른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난 한 사람을 15년간 사랑해 오고 있지만 지루하거나 다른 이성을 만나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혹은 아쉬움이 조금도 없다. 이 한 사람을 알아가는 데에도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고 아직도 파악 중이며 그 과정이 너무 재밌고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생각을 자주 하지 않지만, 속이 깊다.

그녀는 그리 유식하진 않지만, 지혜롭다.

그녀는 화장을 자주 하지 않지만, 특유의 멋이 있다.』


이 외에도 수없이 많은 그녀의 이면들.

내가 그녀와 짧게 만났더라면 결코 알지 못했을 그녀의 진짜 모습을 알아가는 게 좋다. 이를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나를 내던질 용기. 지속적이고 투명하게 상대에게 나의 마음을 내보일 용기 말이다. 그 용기는 시간을 통해 발효되어 비로소 ‘진심’이 되고 그것이 통하면 사랑하는 대상의 진면목을 알 수 있게 된다.


용기가 필요한 또 하나의 시점은 끝을 맞이할 때이다. 많은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 중 하나가 오래 만난 사람과의 이별이다. 하지만 내색하거나 잘 드러내지 않는다. 요즘 사회 분위기는 그런 징징거림을 더 용납하지 않는 것 같다. 찌질 했던 노래 가사가 구리고 후지다며 공감보다는 쿨한 연애를 지향한다. 내면의 마음도 정말 그럴까?


얼마 전 친한 회사 동료이자 동생이 오래 만난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결혼식장까지 예약할 정도로 진지하게 사귀어 온 걸 알기에 난 무척 안타까웠다. 걱정된 마음으로 괜찮은지 물어봤고 그 동생은 의연하게 괜찮은 척 노력하는 게 느껴졌다. 괜찮지 않아도 된다고, 마음껏 힘들어해도 된다고 말해줬다. 그제야 털어놓는 속마음들... 무너지고 있던 속상함의 감정들... 남에게 안 좋은 에너지가 옮겨질까 봐 애써 괜찮은척하느라 더 힘들어하던 동생을 안아줬다.


‘쿨’ 한 것이 다 ‘멋’ 있는 건 아니다. ‘어른스럽게’란 말도 사실 연애에는 좀 어울리진 않는다. ‘연애’는 감정의 비중이 비정상적으로 많이 차지하는 영역이라 오히려 ‘짠하고’, ‘찌질 하고’ 그리고 ‘찐’ 한 게 더 어울린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이 책으로 하여금 그런 나와 그녀의 대단하지 않은 연애 이야기가 독자들에게도 공감과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있다.


조용히 눈을 감고 떠올린다. 책을 쓰기 위해 돌아본 지난 15년간의 시간들이 나에게 다시 살아 돌아와 머릿속에 생생하게 펼쳐진다. 그럴 때마다 그 당시의 그녀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사랑에 빠지고 있다.




마치 15년 전 여자친구와 바람을 피우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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