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느림보)입니다

by 낭만찬

나는 늘 늦었다. 4년이면 졸업하는 대학교도 8년을 다녔고, 직업을 바꾼 탓에 10년 넘게 아직도 신입사원이고, 무엇보다 15년이나 연애하고 이제야 결혼을 한다. IT 강국 변화에 발 빠른 한국에서 서식하기 힘든 돌연변이 느림보가 나다.


“그래. 맞아 나도 늦었어.”


오늘도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여기서 ‘맞아’는 나와 비슷한 느림보들에겐 맞장구의 의미도 되겠지만, 그런 나를 힘겹게 지지하는 나의 가족과 친구들로부터는 등짝 한 대 ‘맞아야’ 하는 일깨움의 단어이기도 하다.


부모님이 힘들게 대학 등록금을 마련해 주셨는데 입학식 날 등록금 빼고 돌아와 재수를 선언했다. (그렇다고 재수를 해서 성적이 오른 것도 아니고 오히려 더 떨어져 안 하는 것만 못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게 공부시켜서 대학 보내고 취직해서 이제야 사람 구실 좀 하나 싶었더니 내 길이 아닌 것 같다며 그만두고 정인이와 세계여행을 떠났다. 남들은 열심히 일해서 돈 모으고 결혼을 준비할 중요한 시기에 난 다시 또 방황을 선택했다. 그 대가는 나이가 들어가고 또래 친구들과 격차가 벌어질수록 냉혹하게 치러야 했다.



눈물 젖은 빵


2018년. 그 당시 내 나이 33세. 세계여행을 하면서 모아둔 돈을 많이 쓰기도 하였고 남은 돈마저 강도에게 털리며 빈털터리로 한국에 돌아왔다. 지구가 다 내 세상인 것만 같던 꿈에서 깨니 월세 23만 원 5평 남짓한 원룸이 내게 허락된 공간이었다. 현실이 찾아온 것이다.


IMG_4605.jpg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도약을 꿈꾸던 시절


평일 새벽에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유통기한이 지난 폐기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였고, 토요일 오전이면 학교 도서관 앞 교회에서 나온 분들이 무료로 나눠주는 빵으로 배를 채웠다. 단팥빵과 곰보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그걸 고민하며 기뻐하는 내 모습이 도서관 유리문에 비칠 때면 애써 외면하려 했다.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다. 하필이면 그날 빵을 나눠준 교회 신도들이 단체로 코로나에 걸렸다는 뉴스가 나왔고 설마 하며 다급하게 쓰레기통을 뒤져 빵 봉지를 확인해 보니 해당 교회 스티커가 붙어져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배급을 받았던 난 2주간 원룸에서 자가 격리를 해야만 했다.


약간 멍해지고 조금 서글펐다. 자가 격리를 해서가 아니라 한국에 온 뒤로 계속 원룸에서 ‘자체 격리’된 생활을 해왔기에 일상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이 나의 현재 처지를 자각하게 하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마치 사회 속에서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무영양가 인간이 된 느낌이 들었다.


나의 눈물 젖은 빵의 역사는 이것이 끝이 아니다. 하루는 공부하느라 고생 많다고 정인이 어머님(지금의 장모님)께서 내가 사는 원룸에 사과즙 한 박스를 보내주셨다. 그 사과즙 한 첩을 안주머니에 넣고 새벽 편의점 오픈을 하며 여느 때처럼 폐기된 빵과 사과즙을 꺼내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다. 제대로 자리 못 잡고 있는 딸의 남자친구가 뭐가 예쁘다고 이렇게 챙겨 주시고 마음을 써주실까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눈물이었던 것 같다.


빵점’이었다. 아들로서도, 남자친구로서도, 예비 사윗감으로서도 난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려웠다. 돈을 아끼려고 가계부 앱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 앱에는 재밌는 기능이 있었다. ‘내 자산 순위’를 나타내 주는 지표였다.


「‘구명찬’님은 30대 후반 남성 중 상위 98%에 속해요.」


처음엔 상위라는 단어에 좋아하려다 잠깐만, 나 그럼 하위 2%란 소리잖아. 아무리 마음씨 좋은 부모님이라도 하위 2% 자산을 가진... 앞으로의 미래도 막막해 보이는 남자친구에게 당신의 귀한 딸을 허락하기가 쉬울까? 내세울 거라곤 오래 만나왔다는 것 말곤 없어 보였다. 빵점도 과하다. 그땐 공부한답시고 신경이 예민했던 때라 정인이에게 괜히 꼬락서니도 많이 부렸으니 마이너스를 줘도 할 말이 없다.


진짜 한 대 맞아야 했다.



헤매다 해내다


‘헤맴’


내가 살아온 시간을 단 한 글자로 표현한다면 이 단어보다 적합한 단어를 찾긴 어려울 것 같다. ‘고난’이라 칭하기엔 평범했고, ‘역경’이라 할 만큼 거창하지도 않았다. 이건 그냥 ‘헤맴’이 맞다.


돌이켜보면 뭐 하나 수월하게 넘어간 적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병치레가 잦아 늘 병원을 수시로 들락거려야 했고 대학교 입학도, 회사 입사도 나에게만 바늘구멍 같았다. 그마저도 그만두고 세계 여행을 하며 떠돌다 이제 곧 마흔, 난 아직도 헤매고 있다.


이런 ‘프로 헤맴러’인 나와 기꺼이 함께 헤매주는 사람이 있다. 나와 같이 걸으면 헤맴이 불가피하다는 걸 알면서도 기어코 15년째 손 꼭 붙잡고 함께 걸어가는 길동무. 그녀가 없었다면 아마도 난 진즉에 지쳐버렸을지 모른다.


이제 더 이상은 헤매는 내가 싫지도 두렵지도 않다. 헤맸다는 것은 무엇인가 찾기 위해 이리저리 노력했다는 뜻이고 난 결코 그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를 속이지도 않았다. 헤맴의 시간들은 늘 솔직했고 나를 알기 위해 해야만 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는 것을 그녀와 함께한 15년이란 시간이 깨우치게 해 주었다.


우리의 15년은 헤맴이란 여과지와 같다. 빵점짜리 남자친구였지만 100점짜리 로맨티시스트라고 생각해 주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도, ‘무재능’인 내가 그녀에게 마음을 전하는 능력만큼은 천부적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도 헤맸기 때문에 가능했다.


내 나이 마흔.

이제 더 이상은 눈물 젖은 빵을 먹지 않는다.

5평짜리 원룸에서 벗어나 전국을 내 세상처럼 달리며 살고 있다.

사과즙 먹으며 느꼈던 감사함을 보답하고 싶어 홍삼액 들고 장인, 장모님 찾아뵙는 사위가 되었다.

등짝 한 대 맞아야 했던 아들은 부모님의 등 따시고 배부른 노후를 위해 노력 중이다.


한참을 헤맸다. 이젠 해낼 차례다.


KakaoTalk_20250125_012856076.jpg


나는 오늘도 길동무와 헤매다 해내고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