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물감을 꺼내다
한동안 그림일기를 쓰지 못했다. 거창한 계획을 꿈꾸면서 작은 그림조차 못 그리게 된 것이다. 산책을 나갈 때면 배낭에 물감을 넣곤 했지만 좀처럼 꺼내지 못했다. 괜히 무거운 가방만 들고다니다가 덜렁덜렁 돌아오곤 했다. 지난 가을도 겨울도 그렇게 지나갔다.
3월 어느 날, 볕이 좋은 날이다. 근처 약사천으로 나갔다. 늘 그렇듯 오리는 자맥질을 하거나 길섶으로 올라앉아 깃털을 골랐다. 오리는 볼 때마다 걸음을 멎게 한다. 마음이 좋다. 청동오리 수컷이 보였다.
- 오리야!
불러보았다. 오리는 가장자리 진흙에 주둥이를 박고 찹찹찹 뭔가를 먹는다. 주둥이를 떼기 무섭게 다시 찹찹찹 먹는다.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따라 하고 싶을 정도다. 찹찹찹 소리가 듣기 좋다.
햇빛을 받은 오리 목덜미는 비단같은 초록으로 빛났다. 자신이 얼마나 우아한지 모르는 오리는 여전히 먹느라 정신이 없다.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다. 봄볕에 올라온 푸른 빛의 봄까치꽃 때문인지, 오리의 초록빛 목덜미 때문인지 알 수 없다. 무언가에 이끌린 듯 했다.
버드나무 아래 의자에 앉아 주섬주섬 수첩과 물감을 꺼냈다. 스텐컵을 들고 개천 돌징검다리로 갔다. 천천히 물을 떴다. 누군가 보아주길 바랄만큼 물 뜨는 몸짓이 내 마음에도 들었다. 오리는 한자리에 있지 않을테니 사진부터 찍어두었다.
손바닥반한 수첩에 연필로 오리를 그렸다. 그리고는 붓에 물을 묻혀 살살 칠했다. 사람들이 지나간다. 궁금하지만 꾹 참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고 잠시 멈춰서 보고 가는 이들도 있다. 70쯤 되어 보이는 남자 셋이 지나간다. 그 중 한 분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말한다.
-그림 잘 그리시네요.
-아, 네 고맙습니다.
-배우셨나봐요.
-아, 그냥 그리고 있습니다.
일행이 지나갔다. 부끄러우면서도 좋았다. 얼추 그림을 그린 뒤 몇 자 썼다. 그림일기가 다 되었다. 이렇게 시작하게 되는 걸까. 이렇게 걸린 시동이 피시식 꺼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흐트러진 그림수첩과 도구를 찍었다. 개천 물이 보이게 찍었더니 퍽이나 아름다운 풍경이 되었다. 컵을 씻고 물건을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