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건너는 우리들의 레시피

방학, 숙제, 독서, 편지, 성장

by 강승숙

여름방학, 설레는 말이다. 여름방학을 생각하면 어릴 때 국어책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수박 밭 가운데 원두막이 그려 있는 삽화다. 우리 집은 농사를 짓지 않았지만 다행히 친구네 집은 농사를 지었고 원두막도 있었다. 여름이면 친구네 복숭아밭 원두막에 올라가서 누가 복숭아 훔치나 감시하는 일을 하곤 했다. 말이 감시지 우린 그냥 놀았다.


원두막 아래엔 커다란 함지박이 있었다. 거기엔 벌레가 먹었거나 바람에 떨어져 상처 난 복숭아가 늘 한가득 있었다. 봉숭아 위로는 초파리와 벌이 윙윙거렸다. 그 중 성한 걸 골라 흠 있는 데는 한 입 베어내고 먹었다. 과즙이 뚝뚝 떨어졌다. 친구랑 놀다가 복숭아를 먹고 다시 놀다가 복숭아를 먹었다.



교과서 속 문장, ‘외가댁에 갑니다.’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 문장은 다정하고 부러운 문장이었다. 외가댁이 없는 내겐 그랬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모두 일찍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시집간 언니 밑에서 자랐다. 사정이 이러니 외가댁이라는 문장은 언제까지나 로망으로 남아있다.


여름 방학의 지루한 날들, 친구네 놀러 가면 친척집에 갔다, 하는 말을 듣곤 했다. 딱히 갈 데가 없어 동네 느티나무 아래로 갔다. 거기서 외가댁이나 친척집에 못 간 친구들과 사방치기나 공기를 하며 놀았다. 땅따먹기를 하거나 작은 돌을 모아 '많은 공기'를 했다. 우린 작은 돌멩이를 산더미처럼 모아놓고 손 등에 올라간 돌멩이로 돌무더기를 냅다 내려쳤다. 그러면 돌무더기에서 촤르르 공깃돌들이 흩어져 나왔다. 그중 몇 개를 건드리지 않고 공깃돌 하나를 올리면서 한 손으로 그러모았다. 날마다 해도 재미있는 놀이였다.


낮에는 오빠들을 따라 개울가에 가서 미꾸라지 잡는 일을 돕거나 저수지에 가서 오빠들이 수영하는 것을 구경했다. 친구들과 종이 인형을 만들고 종이옷을 해 입히며 놀기도 했다. 여름날 저녁이면 마루에서 옥수수나 감자를 쪄먹으며 놀았다. 수박 한 덩이 우물에 담갔다가 시원해지면 잘라먹기도 했다.


어린이들에게 여름방학을 앞두고 선생님의 옛날 여름방학 이야기를 꽃씨주말 신문을 통해 들려주었다.


이어 여름방학을 잘 보내는 방법에 대해 의논했다. 어린이들에게 이전에 읽어준 그림책 <키오스크>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주인공 '올가'는 키오스크가 뒤집히는 바람에 강을 따라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 그러다 뜻밖에도 바다에 이르고 그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올가는 떠나기 전 성실하게 날마다 같은 일을 했다. 키오스크에 찾아오는 손님을 정성껏 대했다. 그 성실함 끝에 뜻밖의 변화가 오고 올가는 과감하게 모험을 한다.


<키오스크>의 올가처럼 어린이들도 성실함을 잃지 않고 지내면서 종종 모험 같은 즐거운 놀이를 해 볼 것을 당부했다. 부족한 교과는 꼭 보충을 하고 취미를 살려보라고 했다. 1학기 동안 친구들과 자주 다투었다면 자신의 말투를 고쳐볼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도 했다. 원*이는 자신이 고쳐야 할 버릇을 센 말투라고 했다. 민*(여)는 오빠와 싸우는 거라고 했다. 민*(남)는 싸움 피하기, 준*는 욕 안 하기, 도*이는 낄낄대지 않기와 대충 하지 않기를 고쳐야 할 버릇으로 정했다.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는 태도는 용기 있는 태도다. 버릇 고치기느 스스로 표를 만들어서 날마다 표시해 보는 방법을 안내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남을 흉보거나 싸우는데 쓰지 말고 긍정적인 일, 좋은데 써보라고 했다.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우리가 읽은 그림책 <야쿠바>의 주인공처럼 자신에게 말을 걸어보면 좋겠다고 했다.

한번 읽은 책은 이렇게 새로운 생활 속에서 다시 등장한다. 야쿠바가 상처 입은 사자를 해치우고 전사가 되는 길을 포기할 때까지 했던 진지한 고민을 되새겨보면 좋겠다고 했다. 동화 <안녕, 단팥죽>의 두 주인공처럼 친구와 어려운 점을 서로 도와가며 숙제를 하는 것도 좋을 거 같다고 했다.

어린이와 정한 과제는 대게 이렇다. 물론 교사인 내가 주도하고 설득한 과제가 대부분이다.


▪나만의 독서록 만들어가기

▪1학기 부족한 과목 복습하기

▪2학기를 위한 역사 공부

▪동식물 관찰 기록장

▪고루 먹고 운동하기


방학에 들어가기 전 한 가지 약속을 더 했다. 방학 중 한 번은 선생님에게 자신이 어떻게 지내는지 사진과 간단한 글로 보고하는 과제다. 또 하나는 선생님에게 편지 쓰기 과제다. 분량은 짧아도 좋으니 어떻게 지내는지 중간중간 꼭 알려달라고 했다.


숙제는 밴드나 페드랫, 문자를 이용했다. 한 때는 손 편지를 써서 우편으로 부치게 했는데 잘 되지 않아서 방법을 바꾸었다.




요즘 비가 너무 많이 오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밖에 나갔을 때도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옷과 신발, 양말이 모두 젖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 영어 학원을 가는데 비가 오지 않더니 햇빛이 쨍쨍해서 신기했고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요즘에 저는 수학, 과학 문제집을 매일 정해진 양을 푸는데 5학년 2학기 수학과 과학은 너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선생님 그럼 안녕히 계세요. ( 8월 10일 우예* 올림)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효*에요! 요즘 덥죠. 저는 에어컨이랑 선풍기 덕분에 그나마 집에서는 시원하게 보내요. 밖에는 너무 더워서 나가기 싫을 때가 많아요. 그래서 집순이가 됐어요. 원래는 밖에 나가는 것도 좋았는데요...... 그리고 저는 요즘 집에서 영화도 보고 배드민턴도 치고, 칼림바 연주도 조금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이제 도서관도 한번 시간이 있으면 가봐야겠어요.

선생님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선생님, 괜찮으시죠? 선생님이 그립네요. 이제 개학도 얼마 안 남은 것 같아요! 이제 5학년 2학기를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야겠네요. 근데 좀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선생님, 친구들이랑 좀 어색할 수도 있겠네요. 일단은! 선생님이랑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면 좋겠네요!

그럼 이제 안녕히 계세요. 8월 5일 금요일 이효* 올림


방학이지만 선생님과 어린이들 사이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여전히 선생님이 어린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중간의 일상보고와 편지로 확인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 듯하다.


시간이 흘러 여름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맞이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는 걸 방학이 지날 때마다 실감한다. 어린이들은 한 달 만에 키도 쑥 자라고 얼굴도 달라진다. 12살인데 벌써 청소년 티가 나는 어린이도 보인다.


힘든 날이 많았던 여름, 큰 비도 오고 숨 막힐 듯 덥고 습한 날들이 이어졌던 여름, 어린이들은 지루함을 견디고 모기와 싸우고 과제와 학원에 힘들어하면서도 틈틈이 알차게 놀았다. 그리고 건강하게 등교했다. 어린이들은 한 달 사이에 뭔가 단단해지고 차분해진 듯도 했다. 공부시간에 집중하려는 의지도 엿보였다. 물론 머지않아 흐트러질 테지만 시작은 좋다. 우리 반 낭송 시 ‘너도 쑥 나도 쑥 너도 나도 쑥쑥’이 떠오른다. 모두 건강한 얼굴로 등교했으니 가장 중요한 숙제, 건강하게 등교하기는 백점인 셈이다.

어린이들에게 개학한 기분을 물었다. 역사 공부를 열심히 한 지호와 민재는 사회시간을 목 빠지게 기다렸다고 한다. 예은이도 준우도 서진이도 한국사 영상을 열심히 보았다고 했다. 설이도 신석기부터 청동기까지 역사 영상을 보면서 공책을 정리했고 효정이도 구석기부터 철기까지 공부했다고 한다. 다른 어린이들도 역사나 영어, 수학, 과학을 공부를 했다며 자랑스레 말했다. 운동을 집중해서 한 어린이도 있었다. 내가 너무 놀았나 하며 후회하는 어린이들도 있지만 대부분, 대단한 여름을 보냈다.

2학기 첫날, 우린 자신의 여름 방학 이야기를 네 개의 핵심어를 표현했다. 어린이들은 정리한 여름방학 핵심어와 그림을 보고는 조금 놀랐다. 생각 이상으로 알차게 방학을 보낸 어린이가 많아서다. 과제물에서도 어린이들의 시간과 땀방울을 느낄 수 있었다. 교사인 나도 나름 노력하면서 여름을 보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린이들이 해온 과제물을 보니 더 열심히 할 걸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핵심어로 정리한 나의 여름>

▪<한국사> 나는 논술 학원을 다닌다. 일단 한국사는 너무 재미있다. 세계사도 재미있다. 한국사는 거의 다 공부를 한 거 같다. 오스크랄로 피테쿠스, 아파렌시스 시대부터 6.25 전쟁까지 다 알고 있다. 이제 세계사를 공부하면 될 거 같다.(이서*)

▪<운동> 다른 건 못해도 운동만큼은 열심히 했다. 걷기도 하고 줄넘기도 했다.(정예*)

▪<핸드폰과 속상함> 내가 핸드폰을 너무 많이 써서 엄마가 핸드폰을 잠근다고 한다. 얘들이랑 톡 하고 그림도 그리고 하는 것도 많은데 난 속상하다.(김아*)

▪<책> 매일 책을 한 시간씩 읽었다. 그중에 소설책을 제일 많이 읽었다. 이유는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과학이 부족한 거 같아서 과학에 관련된 책을 읽었다.(박준*)

▪<운동> 팔 굽혀 펴기를 많이 해서 좋았고 운동을 많이 해서 힘들었지만 체력이 늘어난 것 같아서 뿌듯했다.(이도*)

▪<집돌이> 집에만 박혀있었다. 부산 여행을 간 적은 있지만 대부분 집에 있어서 집돌이가 되었다. 방학 중 80%는 집에 있었다. 평생 집돌이, 나쁘지 않을지도...... <운동> 점점 내가 사람이 아니구나 생각이 들어서 가끔 집에서 운동을 했다. 운동을 하다가 안 사실인데 내가 통뼈라는 사실이다. (조하*)

▪<다이소> 친구들이랑 덥고 할 게 없어서 내가 좋아하는 다이소를 갔다. 근데 다이소도 많이 가고 많이 물건을 사서 이제 다이소도 뭔가 좀 질린다. 앞으로 친구들이랑 놀 장소를 정해놔야겠다.(김민*)

▪<독서> 난 이번 방학에 평소보다 책을 많이 읽었다. 내가 읽은 책은 주로 유명한 작가 '로얄드 달'의 책을 읽었다. 그중에 <기발하고 유쾌한 학교>라는 책도 읽었다. 명작들을 더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아이세움' 논술이란 책 시리즈도 읽었다. 또 역사책을 읽었다. <물> 난 방학 동안 채송화 부장이었다. 그래서 농구부를 나갈 때 거의 물을 주었다. 하지만 그래도 채송화가 마른 것 같아 민준이와 함께 채송화에게 물을 듬뿍 주었다. 그다음부턴 아파서 학교를 못 갔는데 다른 채송화 부장이 물을 안 준 것 같아 걱정했다.

(황재*)


서로 쓴 핵심어를 가지고 짝과 대화를 한 뒤 몇 팀은 앞에 나와 발표를 했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열심히 생활한 어린이들은 큰 박수를 받았다. 솔직하게 설렁설렁 보낸 어린이도 친구들에게 나름의 웃음을 선사했다. 어린이들의 방학생활 발표에 이어 선생님의 방학생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핵심어 하나는 역사다. 어린이들이 방학 전부터 조선 왕의 순서를 외우는 등 역사에 큰 흥미를 보였다. 나도 긴장이 되었다. 어린이들에게 처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역사 공부는 어느덧 세계사 공부로 이어졌다. 세계 1, 2차 대전을 공부하다가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으로, 로마시대까지 가게 되었다.


날마다 두세 시간씩 역사 영상을 보면서 두꺼운 공책 한 권이 꽉 차도록 정리한 걸 어린이들에게 보여주었다. 역사 강사마다 강조하는 점이 달라서 책도 찾아보고 검색도 하면서 비교하며 공부했더니 더 흥미로웠다는 말도 덧붙였다. 세계사 공부까지 하게 된 이유는 어린이들하고 역사 공부를 할 때 배경 지식을 풍부하게 하려는 까닭에 있다. 역사에 흥미가 커지고 있는 어린이들은 내 이야기에 크게 공감했다.


두 번째 핵심어는 주문진이다. 주문진은 춘천에 들어오기 전 2년간 근무한 주문진 초등학교가 있는 곳이다. 그곳에 근무하면서 2년을 살았는데 아는 분들이 꽤 있다. 주로 시장 사람들이다. 나는 날마다 퇴근하면 시장에 있는 식당으로 가서 남편과 저녁을 먹었다. 남편은 사진을 찍으면서 사람들 이야기를 기록했고 나는 그림일기를 썼다.


어린이들에게 들려준 <아모스와 보리스>라는 그림책을 읽어을 때에는 항구에서 일하는 분을 인터뷰해서 배를 타고 나갈 때 꼭 가져가야 할 게 무언지 듣고는 어린이들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이번에 방문했을 때도 역시 가게 분들은 반가이 맞아주었다. 음식을 푸짐하게 주었고 여행하면서 먹으라고 반찬을 싸주기도 했다.


방학을 차근히 준비하고 방학 중에 SNS도구로 어린이와 통신을 한 뒤 2학기를 맞이하면 1학기와 방학, 2학기가 자연스레 연결되는 듯하다. 느슨하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선생님과 어린이, 과거와 오늘의 거리감을 줄이기 위해 선생님의 어린 시절 여름 방학 이야기를 들려주고 부모님이나 할머니의 여름방학 조사하기 같은 걸 과제로 넣어도 괜찮을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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