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이 불고 칠엽수 열매는 떨어졌다

칠엽수 열매와 어머니, 비바람부는 날 야외테라스

by 강승숙

남편은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질 때, 뜨거운 해를 피해야 할 시간에 걷는 사람이었다.


-아무도 나가지 않는 이 시간에 나가야 하는 거야.


한때는 제정신이냐고 따져 묻기도 했지만 어느덧 이런 일에 익숙해졌다.


풍물시장 '북산집'에서 북어찜을 먹고 나올 즈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늘은 불안한 구름으로 짙어졌고 남편의 감각은 예민하게 가동되기 시작했다.


-편의점 앞 야외테이블서 맥주 할까!


괜찮다고 했다. 야외테이블 앞 도시 풍경이 좋았고 가로수 칠엽수를 보는 것도 좋아서였다.


편의점 앞 수개의 야외 테이블 파라솔은 모조리 접혀있었다.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자리에 있다가도 파라솔을 접고 일어설 시간이었다.


남편이 물건을 사러 간 사이 테이블과 의자에 떨어진 빗방울을 닦았다. 남편은 캔맥주 한 개, 과자 한 봉지를 사 왔다. 초록 파라솔을 폈다. 남편과 나의 2인 무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관객들은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공연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곧 무엇이 다가올지 알고 있었다.


캔뚜껑을 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딱! 하며 정신이 번쩍 드는 소리가 들렸다. 칠엽수 열매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고 동시에 내 몸은 스프링처럼 열매 쪽으로 튕기듯 움직였다.


설레는 맘으로 열매를 주웠다. 올해 처음 줍는 칠엽수 열매다. 겉은 영락없는 호두, 알맹이는 밤을 똑 닮은 사랑스러운 열매다.



어디 더 없나 두리번거리는데 도로변 경계석 부근 고인 물속 열매들이 보인다. 안타깝다. 눈길은 자연스레 도로 한가운데로 옮겨갔다.



자동차에 치여 으깨어진 칠엽수 열매들의 잔해가 눈에 들어왔다. 이들은 열매로 완숙하여 세상과 대면하는 첫 순간 도로에 떨어지고 말았다. 애도하는 이 없는 칠엽수 열매의 마지막을 애잔히 여기며 잠시 보았다.



테이블로 돌아와 책 위에 열매를 놓았다. 후배의 추천으로 도서관에서 빌린 소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다. 소설의 시작은 자못 충격적이다. 어느 날 오래된 다리가 무너지면서 여행객 다섯이 계곡 아래로 추락한다. 끔찍한 서두에 이어 그 죽음의 필연성을 설명하려는 신부가 등장한다.


그렇게 시작하는 소설책 표지에 방금 나무에서 절벽으로 추락한 칠엽수 열매가 놓여 있다. 기이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남편은 흥이난 듯 즐겁게 맥주를 마시고 있었고 물끄러미 칠엽수 열매를 보고 있던 나는 상념에 빠져 열매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린 뒤 열매를 싼 껍데기 안쪽에서 흰 속살을 조금 떼어냈다. 그리고는 그림에 문질렀다. 처음엔 무채색이던 즙은 잠시 후 누렇게 갈변했다. 물감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그림 옆에 몇 자 썼다. 실은 쓰고 싶은 문장이 있었지만 슬퍼질 거 같아 그만두었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쓰지 않은 기억은 칠엽수 열매를 보는 순간부터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2014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이다. 어머니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예감했지만 손가락으로 셀만큼 남았을 거란 상상은 할 수 없었다. 막연히 오래지 않아 돌아가실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퇴근하면 날마다 요양원에 갔다. 어머니를 뵙고 나오면 이미 날은 어둑해져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요양원 현관문을 막 나서는데 밤톨 같은 열매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어머니도 시름도 잊고 미친 듯이 열매를 주웠다. 그러다 위를 올려다보았다. 야자수 같은 이파리를 가진 나무가 보였다. 아무리 둘러봐도 밤나무는 없었다.


칠엽수 열매를 가방에 스무 개 남짓 넣고서야 자리를 떠나 집으로 갔다. 그날 애쓴 끝에 내가 주운 열매가 칠엽수 열매라는 걸 알아냈다. 그날부터였던 거 같다. 칠엽수 열매를 보면 요양원 앞 정경이 떠올랐다. 칠엽수 열매와 요양원, 어머니가 한꺼번에 오버랩되곤 했다. 칠엽수 열매는 내게 그리운 열매가 되었다.


그림을 남편에게 보여주었다. 남편은 늘 그렇듯 잘 그렸다고 칭찬을 했다. 하늘은 더 시커메졌고 후드득후드득 빗방울이 굵어졌다. 바람도 세졌다.


- 일어설까?

- 지금 좋은데! 우산 펴서 막아봐!


우산을 펴서 등 뒤를 맞았다. 그래도 비는 바람을 타고 사정없이 빈구석을 치고 들어왔다. 우산을 하나 더 펼쳤다. 남편은 그 모양이 재미있다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흔들리는 칠엽수와 어둑한 하늘, 우산으로 비를 막고 있는 나를 찍기 시작했다. 남편은 독립 영화 찍는 감독처럼 진지했다.


의자에 비가 들이치면서 기어이 바지 엉덩이 쪽이 젖어들었다. 그제야 일어섰다. 파라솔도 접었다. 이미 빗물은 곳곳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남편은 샌들을 벗었다. 나도 따라 벗었다. 우린 맨발로 물이 고인 도로를 철벅철벅 건넜다.


부부가 펼치는 빗속 야외공연이 끝났다. 칠엽수 열매는 주머니에 고이 넣어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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