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 이야기 52~55
이녁의 강
- 강 이야기 52
떠날 적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지난 일 년이 하루 같았고
지난 일 주일이 한나절 같아
내가 이녁을 떠날 적엔
나는 얼마나 머물다가 가는 걸로
생각했을까
언제나 무심하게
잠시 갔다가 금방 돌아올 것처럼
웃으며 떠나고
웃으며 떠나보내고
이녁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떠나와
이제는
이곳이 더 편안해졌다 하면
이녁의 하루는
얼마나 허망할런지
팔자의 강
- 강 이야기 53
어디서부터 시작하였을까
울 엄니 뱃속에서
이 세상으로 나와선
아버지 엄마 큰누나 둘째 누나 셋째 누나 형님 그리고 동생
그렇게 모여 살다가
이 세상으로 떠나와선
아버지 떠나가시고 어머니마저 떠날 채비를 하고 계시는데
부모 형제 식솔들을 떠나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고흥-포항-부산-울진-서울로 떠돌다가
이 나라에 와서는
다낭-하이퐁-하노이-호치민으로
이 강 저강을 건너다니는 건지
이 객팔자
저 강에 내던지고나 말지.
몸살의 강
- 강 이야기 54
몸살이 오려는지
온몸 여기저기가 쑤시고
편도까지 부어서
한 번쯤은 겪고 가려나 했으니
한 번 잘 겪고 건너가 보자며
더운 날씨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밤을 견디며
새벽 강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지
간밤에는 몸이 아프더니
아침에는 맘도 아프구나
일은 하러 나가봐야 할 것 같아
두꺼운 잠바 하나 꺼내 입고
강을 따라 나서는 하루
몸도 맘도 천근만근인데
아프지 않고 사는 생이
어디 있으랴 싶어
기를 쓰고 움직여보네
낮의 강
- 강 이야기 55
밤은 흔적도 없고
밤은 기억조차도 못하고
지난 밤 내내
무슨 신이라도 내리렸는지
신열이 왔었지
그래도
시는 한 줄 써야겠다며
낮에 밤을 줍겠다고
펜을 들고 앉았더니
낮은 어둠처럼 아득하고
시는 첫 애인의 입술같이
첫 행이 어렵기만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