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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버스앤러버스 Aug 01. 2023

한여름엔 <봄날은 간다> 은수처럼 가볍게, 편하게

에디터 일영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의 패션은 어디쯤에 있을까. 극 중 은수는 헐렁헐렁한 반팔 티셔츠나 셔츠, 붙지 않는 바지를 입고 주로 단화를 신고 나온다. 몸에 압박이 전혀 없는 옷을 입다 보니 가끔은 보이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그도 그럴 것이 2000년대 초반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은수와 상우는 연애에서 남녀의 성역할이 바뀐 것처럼 보인다. 허진호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봄날은 간다>를 준비하며 그는 “좀 빨리 만나고, 좀 빨리 사랑하고, 좀 빨리 같이 자고, 좀 빨리 헤어지고, 그리고 나서 잊어버리기 힘들어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작품 속에서 이 모든 전환점을 주도한 것이 바로 은수다. 두세번째 만남 만에 훅 다가오더니 혼자 식어버리고는 이별을 통보한다. 자고 일어나 눈 비비며 주인만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상우와 덤덤하고 직선적인 은수의 대비되는 성격이 바로 이 영화를 마지막까지 끌고 가는 장력과 같은 힘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은수의 옷은 은수를 옥죄지 않는다. 금방이라도 훌훌 날아가 버릴 것처럼 가볍고 자유롭게, 또 일에 있어서는 프로정신을 발휘하는 그답게 활동성 있는 옷들을 입는다. ‘분명 나도 상우처럼 지고지순 무거운 사랑을 하고 싶었는데, 어라, 그냥 은수 정도의 무게로 살아볼까?’ 아직 어떤 사랑을 해야 할지 결정도 못한 20대지만 은수의 옷장을 잠시 훔쳐 보기로 했다.


90년대? Y2K?

<봄날은 간다>는 2001년에 개봉한 영화로 시기상으로는 Y2K에 해당한다. 우리가 아는 Y2K는 하이틴 스타처럼 크롭 티셔츠에 로우 라이즈나 카고 팬츠를 매치하는 것인데, 그에 비하면 은수는 교실 맨 앞 줄 모범생 패션이다. 아래 사진처럼 2000년대 패션 아이콘이었던 패리스 힐튼, 브리트니 스피어스는 채도 높은 원색 계열에 밝고 경쾌한 느낌을 표현했고, 국내에서는 백지영, 왁스, 서인영 등이 이런 스타일을 즐겼다. 은수는 이런 스타들과는 성향도 스타일도 거리가 멀다. 노출 하나 없는 스트레이트 실루엣에 희끄무레한 파스텔 톤의 옷들을 입기 때문에 확실히 Y2K는 아니다.   


그렇다면 1990년대 말에 유행했던 패션일까? 그렇지도 않다. 90년대에 20대를 보낸 X세대에게는 자유분방함이 패션의 미덕이었다. 딱 붙는 가죽바지, 펑퍼짐한 힙합바지, 투박한 신발 등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아 ‘신인류’라는 별칭까지 붙었다. 그나마 동시대에 유행한 ‘톰보이 스타일’이 은수와 가까워 보이지만, 고의적으로 엄마 재킷을 입고 숏컷을 한 당대의 스타일과는 차이가 있다. 은수는 옷에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패션의 흐름을 훑으며 은수는 이런 유행에서 이미 벗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애초에 은수를 틀에 맞추려 한 것이 잘못되었다. 그는 처음 만난 남자 앞에서 CD로 이에 묻은 것이 있는지 확인하고 초면에 “쌍꺼풀 수술했죠?”라고 묻는 거침없는 사람이다. 유행을 의식했을 리도 없고 유행을 알더라도 나에게 편한 옷을 입었을 사람이다. 스스로의 결정에 확신을 가질 만큼 경험이 많기도 하다. 설령 남들이 촌스럽다고 해도 웃어넘겼을 것이다. 이렇게 강단 있는 여자와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는 남자의 만남이 참 얄궂게 느껴진다.



은수의 옷장을 찾아서

밖으로 나가 은수의 옷장 속 옷들을 찾아 떠나볼 시간이다. 요즘 입는 옷들이 아니기 때문에 브랜드를 고르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우선 특색 없고 기본적인 옷들이니 SPA 브랜드가 적절할 것 같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자라나 H&M처럼 유행을 즉각적으로 반영하는 브랜드는 안 된다. 눈을 돌려 국내로 오니 에잇세컨즈, 스파오는 20대 패션에 치중되어 있다. 은수가 입을 법한 브랜드는 어디에 있을까. 탐방 전에도 예상했지만 정답은 유니클로에 있었다. 비교적 넓은 연령대가 방문하고 유행을 크게 따르지 않는 곳. 고양 스타필드를 만 보 넘게 헤맸지만 결국 모든 옷을 유니클로에서 구할 수 있었다.


유니클로 포켓터블 UV 프로텍션 파카 (₩49,900)

첫번째로 구매한 옷은 보자마자 ‘은수다!’를 속으로 외쳤던 회색 자켓이다. 은수와 상우가 계곡에 소리를 녹음하러 갔을 때 입은 옷으로, 후드가 달린 옅은 회색 자켓에 흰 셔츠, 어두운 색 데님을 함께 입었다. 은수가 입은 자켓은 좀 더 이장님이 입을 법한 기본적인 스타일인데, 이 옷은 자외선 차단 기능도 있고 두께도 얇고 디테일도 많다. 2000년대 느낌을 내기에는 최신식 기능성 의복이지만 최대한 다른 옷들로 은수 느낌을 살려 입어보려고 한다.


유니클로 크루넥 T (₩12,900)

두번째는 베이직한 흰색 티셔츠다. 은수가 녹음실에서 입은 스타일을 따라하고 싶었는데, 내 옷장에는 요즘 옷처럼 타이트한 티셔츠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느낌이 많이 달라지겠다 싶어 스탠다드 핏의 티셔츠를 새로 구입했다. 유니클로가 티셔츠는 탄탄하게 잘 만든다고 알려져 있으니 필요하신 분들은 만원 대에 쟁여놓아도 좋을 것 같다. 가지고 있는 슬랙스와 매치할 예정이다.


유니클로 오버사이즈 T (₩19,900)

마지막으로는 넓은 단가라 티셔츠다. 회색이 좀 더 옅고 흰색 부분이 연두색이었으면 완벽했겠지만, 이 정도 너비의 줄무늬 티셔츠를 찾는 것도 힘들었기 때문에 양보했다. 지금도 가격인하 중이었는데, 이 옷은 이 글이 아니었다면 나도 살 일이 없었을 것 같다.



2023년, 은수처럼 사진 찍기

맑고 투명한 영화의 질감을 살리기 위해 빽빽한 건물숲을 벗어나야 했다. 2023년으로 은수를 소환시키기 위해 은수와 상우가 머물렀던 모래사장, 계곡과 최대한 비슷한 분위기의 장소를 방문했다. 맑은 물이 흐르는 서울 은평구 불광천을 배경으로 택했다.

바람막이는 요즘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아이템이지만, 속에 단정하게 흰색 셔츠를 받쳐 입으니 2000년대 느낌이 훅 진해졌다. 촬영 전에는 흰색 세미크롭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속에 입은 옷을 바꾸는 것만으로 시간을 이동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두번째 옷인 단가라 티셔츠를 입었을 때는 정말 은수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은수 정말 편하게 입고 다녔구나’가 실감되는 순간이었다. 바람도 술술 통하고 동작도 커지고 잠시나마 은수 못지 않게 털털한 여성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래사장과 헤드폰이 없어 아쉬웠지만 생각이 많아보이는 은수를 따라해보았다.

마지막으로 은수의 직장, 녹음실에서의 착장이다. 은수처럼 라디오 PD는 아니지만 작은 팟캐스트 채널을 운영하고 있어 다행히 매주 녹음실을 갈 일이 있었다. 익숙하게 털썩 녹음실 의자에 자리잡던 은수를 떠올리며 편안한 복장으로 녹음을 하고 돌아왔다.



은수는 진짜 2000년대에 살았고, 그로부터 약 20년이 지나 그때의 패션이 다시 유행하고 있다. 아예 크거나 아예 작은 옷들이 유행하는 지금, 정석적인 이 패션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지극히 평범한 패션을 추구하는 것이 오히려 강한 자기확신이 필요한 일처럼 느껴진다. “역시 은수…”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길거리를 다니다 보면 엇비슷한 스타일로 입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유행이 빠르게 번지는 요즘은 피드에 노출되는 패션에 익숙해져 옷을 보는 안목도 서로서로 닮아가는 것 같다. 은수의 패션은 지금의 기준에서 특별히 세련되거나 멋스럽지는 않을 수 있지만 그만의 기준으로 자신을 잘 보여주도록 갖춰 입었다. 나와 비슷하게 입은 사람들을 발견하는 일에 지쳤다면 나를 잘 드러내는 옷들을 입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어떨까. 큰 흐름에 올라타는 것이 훨씬 쉽겠지만, 남들과 다르지만 나를 닮은 옷에서 가벼움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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