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철학 서론

몇 가지 실마리들

by 황인석

몇 가지 실마리들.


1.

우리는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대체로 어느 정도는 철학에 의존한다.

그날그날의 경험에 몰두하느라 그 깊은 의미를 아예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는 내가 살고 있는 삶이나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묻고 어떤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그 결론들을 상기하면서 살아간다. 예를 들어 나에겐 가족의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거나, 무난하게 지내는 것이 행복이라거나, 워라밸이 중요하다거나, 또는 그보다 직장에 헌신해 성취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거나, 이런 것들이 다 일종의 철학이다.
돈을 쓰거나 여가를 보내는 방법을 결정하거나 무언가 선택을 할 때 그 기준으로서 철학이 필요할 뿐 아니라, 철학은 우리가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는지, 그리고 그 일들로부터 어떤 정서가 일어나는지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2.

누구나 어느 정도 철학을 갖고 있고, 그 철학은 우리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철학자들처럼 일관성이 높은 논리 체계를 갖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대신 우리는 속담과 비슷하게 단편적인 명제들의 뭉치를 갖고 삶에 임하는데, 이런 명제들은 명확하게 의식되기도 하고 무의식 속에 습관처럼 자리를 잡고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런 의식적, 무의식적 명제들은 우리가 맞이하는 각종 선택의 기준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정서와 무의식적인 생각들, 각종의 사태들에 일어나는 반응들에 영향을 미친다.

또한 이런 명제들은 책을 읽거나 숙고를 통해서 얻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상당 부분은 TV 드라마와 영화, 지인들과의 대화, 직장과 일상에서 겪는 경험들로 비롯되어 마음을 스쳐지나가다가 간혹 그물에 걸린 듯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는 생각과 느낌들로 구성된다.


3.

그렇기 때문에 철학의 가치를 그 논리적 정합성이나 일관성, 진리와의 일치 여부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모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은 자유의지의 존재를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결정론을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그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되지 않고 양립된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 주제에 대한 내 결론은 자유의지도 존재하지만 결정론도 맞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자유의지의 개념을 마음 속에 넣어두고 있을 때는 정의감과 책임감이 주된 정서를 이루고, 결정론의 개념을 마음 속에 넣어두고 있을 때는 관용과 편안함이 주된 정서를 이룬다.

사실 철학적 명제의 대부분은 전적으로 맞지도 않고 전적으로 틀리지도 않은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명제는 참인가?

용기가 필요한 상황도 있고 용기보다 신중함과 분별력이 필요한 경우도 많기 때문에 이런 명제는 옳기도 하고 옳지 않기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용기를 발휘해야 하는 순간에는 그에 도움이 되는 명제들을 마음 속에 넣어두는 것이 도움이 되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신중함에 도움이 되는 명제들을 마음 속에 넣어 두는 것이 유용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실용적 철학이란 논리로 쌓아올린 피라미드나 조각 하나를 빼내면 무너지는 젠가 게임의 탑이 아니라, 쓸 수 있는 연장들을 모아 둔 도구상자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에겐 좋은 도구들을 상자 안에 갖추어두는 것과 더불어 적절한 상황에서 적절한 도구를 꺼내어 쓸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4.

이런 이야기를 쓰게 된 계기는 오월의 좋은 날씨다. 오늘은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으며 바람도 적당하고 공기도 깨끗하다.

이런 날씨에는 그냥 행복하면 된다. 아침 출근하자마자 회의 시간에 감사할 일들을 발표한다는 어떤 회사의 이벤트처럼 과장하고 억지를 부리는 방식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행복하면 된다.

객관적인 여건을 무시하고 행복이 마음가짐에 달린 문제라고 하는 것은 교만한 주장일 것이다. 하지만 마음가짐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불행한 여건과 별다른 노력 없이 저절로 행복해질 수 있는 여건 사이에는 상당한 간격이 있고, 그런 어중간한 현실 속에서 철학에 영향 받는 우리의 마음가짐은 상당한 편차를 만들어낸다.

철학이 행복을 위한 최선의 방법들을 제시해주지는 못하더라도, 불행을 가져오는 생각들의 상당 부분이 과장된 것이거나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 적어도 그 힘에 절대적으로 따를 필요는 없음을 알려줄 수 있다. 또한 개념과 명제들이 갖는 마법과 같은 효과들에 대해 인식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불행을 완화하고 가능한 행복을 방해하는 생각과 습관들에 대응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개념들과 명제들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행복이 지고의 가치는 아니겠지만 좋은 날씨에는 일이 잘 되듯, 불행이 적으면 많은 일들이 순조롭게 풀려 나가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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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Chat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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