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얼마나 열심히 선택하고, 얼마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일까?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지 여부는 오래된 철학 논제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자유의지를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의지라고 정의한다면,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닐까?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고를지 짬뽕을 고를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은, 권위적인 직장 상사와 함께 간 경우가 아니라면 더 따져볼 필요도 없는 일 같다.
하지만 문제는 자유의지가 결정론과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결정론이란, 모든 일에 원인이 있고 인과관계의 연쇄를 통해 세상 만사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뉴턴의 운동 법칙에 의해 행성의 운행 궤도가 결정되는 것처럼,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나름의 법칙에 의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이다.
자유의지의 존재가 자명해 보이는 만큼이나 결정론 역시 자명해 보인다. 인간의 선택은 자유로워 보이지만 선택은 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나름의 원인들을 갖는다. 선택하는 사람의 동기, 가치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정서 상태 등이 직접적인 원인이고, 옆 테이블에서 풍기는 짜장면 냄새나 함께 간 동료의 의견 같은 상황 요인들이 작용한다. 이런 원인들은 그 나름의 원인들을 가지는데, 특히 동기나 판단, 정서 같은 내적인 원인들은 그 사람이 타고난 천성과 환경, 우연한 경험들 등의 원인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두 가지 명확해 보이는 사실, 즉 내게는 자유롭게 선택할 의지가 있다는 것과 내 의지는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존재한 다른 원인들의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이 서로 모순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자유의지의 역설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것이 왜 문제가 될까? 선택할 자유도 존재하지만, 선택하는 의지는 그 나름대로의 다른 원인들을 가진다고 해 버리고 넘어가도 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이 문제가 철학에서 중요한 논쟁 주제로 다루어져 온 원인 중 하나는 자유의지가 기독교 교리와 연관된 문제라는 데 있을 것이다. 기독교 신자 입장에서 구원 만큼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할까? 교리에 따르면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믿음을 갖는지 갖지 않는지 여부가 온전히 그 사람의 자유로운 의지에 달린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기독교를 믿는 가정에서 자라나 자연스럽게 신앙을 갖게 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감명 깊은 설교를 듣고 신자가 된 사람과 그런 설교를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이 그런 환경이나 우연한 경험의 영향으로 인해 영원한 천국을 약속 받거나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은 좀 불합리한 일이 아닐까? 또한 세상 만사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 하에 계획된 것이라고 하면 각 사람이 옳은 교리를 믿거나 믿지 않는 것 역시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지 각자의 자유로운 의지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런 문제가 중요하지 않을 수 있지만, 종교 밖에도 비슷한 맥락의 문제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범죄자에게 얼마나 책임을 지우는 것이 합당한가의 문제가 있다. 범죄자가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처벌을 받는 것은 당연해 보이지만, 결정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범죄자의 책임은 제한적이다. 왜냐하면 범죄를 저지른 동기는 범죄자가 자란 가정 환경, 어린 시절의 경험, 억제하기 힘든 충동, 범죄를 저지를 당시의 상황 등 범죄자에게만 책임을 묻기 어려운 여러 원인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어떤 사람의 선택과 행위는 유전과 환경 등 그가 책임질 수 없는 요인들로 인과관계의 연쇄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래서 결정론자들은 사법체계에 의한 처벌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은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공리주의적 정당성 때문이지 저지른 죄에 대한 합당한 처벌을 내린다는 응보주의적 정당성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현실에서 이런 주장에 거부감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며, 행위에는 마땅한 책임이 따라야 한다고 믿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합당한 책임이고 어디부터가 당사자가 책임을 경감 받을 수 있는 불가항력적 요인의 결과인지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은 어렵다. 법관들은 과실인지 고의인지, 범죄자의 나이가 몇 살인지, 계획적이었는지 충동적이었는지 등을 따져 양형에 반영한다. 정신 병력의 유무도 중요하게 고려되고, 술에 취한 상태에서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 과거에는 관용적인 편이었지만 더 엄격해지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현실의 사법 체계는 극단적인 자유의지나 결정론의 입장에 서기보다는 다양한 기준으로 행위의 요인을 평가해 책임의 비중을 판단한다.
그 밖에도 자유의지의 역설은 주로 책임의 문제와 연관이 된다. 진보적인 입장의 사람들은 주로 환경의 중요성을 중시하며 사회의 개선을 통해 사람들에게 더 나은 여건을 마련해 주는 데 관심을 갖는 반면,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개인의 책임을 중시하고 평등보다는 각자의 선택과 노력에 따른 몫을 받는 것이 정의라고 믿는다. 보수적인 사람들이 성실함의 가치를 중시한다면, 진보적인 사람들은 흔히 이야기하는 성실함이나 성공에 도움이 되는 다른 자질들 역시 유전과 환경의 영향이 크다는 것에 주목한다. 어떤 인간의 현재 모습이 그가 타고난 천성과 살면서 겪은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다시 말해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없는 아기 때의 경험이 유년기의 그 사람을 결정짓고, 유년기에 그 사람이 지녔던 모습이 그 이후의 경험과 상호작용하며 다음 단계의 그 사람을 결정짓는 방식으로 계속 해서 인과관계에 따라 인간이 변화해 간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현재 모습에 대한 책임을 당사자에게 묻는 일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공정한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의 선택과 의지에 의해 자신의 삶을 바꾸어 나갈 수 있으며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는 직관 역시 강력하다.
결국 이 역설은 철학적인 논리를 통해 해결이 된다기보다는, 실용적인 관점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의 문제로 접근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즉, 어떤 상황에서 책임을 물어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 당사자가 아닌 다른 요인들에 주목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특별한 철학적 개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방식으로 상황에 적합한 판단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면서 내 어깨를 밀치고 간다면 우리의 마음 속에선 자연스러운 분노의 감정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 사람이 별다른 의도 없이 길을 서두르다가 실수로 그런 것이라고 여겨지면 우리 마음은 누그러지고 관대한 결정론자가 된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어떤 악의를 가지고 일부러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우리는 상대에게 보복하고 싶어하는 자유의지론자가 된다.
우리의 사회 생활의 상당 부분은 그러한 판단들에 의지한다. 나에게 불친절한 상대에게 나는 분노해야 하는가? 그가 불친절한 이유가 방금 전 상사한테 부당한 이유로 혼나서 기분이 나빠서 그런 거라면 이해해 주고 넘어가야 하는가? 아니면 그가 무슨 원인을 가졌던 간에 잘못한 건 잘못한 일이라는 입장을 가져야 하는가? 우리는 피의자의 행위를 결정지은 여러 요인들의 무게를 재는 판사처럼 사람들의 행동을 결정짓는 요인들을 보면서 이해하는 결정론자와 책임을 묻는 자유의지론자 사이를 오고 간다.
책임을 묻는 대상자가 자기 자신일 때도 비슷하다. 우리는 자신이 한 선택의 잘못에 대해 자책감과 후회를 느끼고, 심하면 자긍심에도 타격을 입는다. 하지만 선택에 불가항력적인 원인이 있었다는 생각은 위안을 주고 자책감을 완화해 준다.
자유의지와 결정론에 관해 형이상학적인 여러 논의들을 할 수 있겠지만, 실용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자유의지와 결정론은 참과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떤 입장을 어떤 비중으로 가질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뇌종양에 의해 통제할 수 없는 충동 속에서 연쇄살인을 저지른 사람(결정론 입장에서 자주 인용하는 실제 사례이다)에 대해서는 결정론적 입장을 갖고, 술에 취해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입장에서 책임을 묻되 약간 경감해 주는 식이다. 또한 굶주림 같은 절박한 상황에 몰려 한 행동에 대해서는 결정론적 입장에서의 관용을 베풀 수 있지만, 상황의 절박함 정도나 다른 사람에게 미친 해악의 정도 등 여러 기준을 따져, 우리는 자유의지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20%가 존재할 수도 있고 70%가 존재할 수도 있는 것처럼 책임을 묻는 수준을 조정한다.
이러한 입장 선택은 행위의 주체가 처한 상황 뿐 아니라 해당 행위를 평가하는 사람이 갖는 목적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우리가 오래 된 과거의 역사를 공부할 때는 결정론의 관점을 갖고서 일어난 일들이 어떤 연유로 일어나게 되었는지 이해하고 교훈을 얻는 일에 중점을 둔다. 하지만 우리가 아이를 양육하는 부모의 입장이라 하면, 아이가 자유의지를 갖고 스스로의 행동을 교정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훈육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훈육은 결정론적 관점에서 아이가 특정 행동을 하는 원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병행이 되어야 효과적이다. 즉, 실용적 차원에서 보자면 우리는 결정론을 전제로 한 이해의 노력과 자유의지를 전제로 한 변화의 시도를 병행해야 한다.
더 구체적인 지침을 제안하자면, 우리는 자신과 타인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는 자유의지를 전제하고 결정론을 보조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 좋고, 변화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한 문제에 대해서는 결정론의 입장을 갖는 것이 좋다. 지나간 과거에 대해서는 자책감을 느끼기보다는 과거에 일어난 일의 원인과 결과를 담담하게 이해하는 편이 낫고, 내가 영향력을 미치기 어려운 타인의 행동에 대해서는 분노를 느끼는 것보다는 사물의 현상처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편이 나을 때가 많다. 분노나 후회 같은 감정은 마음을 갉아 먹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변화가 가능한 상황에서는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고 결정론으로 도피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내 의지로 바꿀 수 있는 상황과 그렇지 않고 수용해야 하는 상황을 구분하는 것이 항상 쉬운 일은 아니다. 나의 의지로 다른 사람에게 얼마만큼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지만, 나의 삶, 나의 모습도 내 뜻대로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야기들을 흔히 접한다. 절망적으로 보이는 환경을 의지로 극복하여 성공을 이룬 이야기들이다. 아마도 우리가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상황에서 의지의 역할을 자각하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돌파구를 열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결정론의 장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통해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훌륭한 생각이지만, 잘못하면 그것은 너무 많은 부담을 자기 자신에게 지우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지나친 부담을 지는 일의 해악은 단지 좀 힘든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책임의 부담은 우리를 무겁고 느리게 만들며, 불안하고 얽매이고 경직되고 시야가 좁아지게 만든다. 그 폐해는 의지와 책임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수준보다 훨씬 클 수 있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온전히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결정론은 어느 정도의 편안함을 제공한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결정된 것들, 주어진 것들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의식적인 고민과 결정이 필요한 일부 사안에만 집중한다. 바람에 돛을 맡기고 나아가면서 가끔씩만 돛의 방향을 바꾸는 항해자와 비슷하다. 끊임 없이 노를 젓는 사람은 오래 가지 못한다. 우리는 편안함의 가치를 과소평가하지 않아야 한다.
자유의지의 문제가 수면에 떠오르는 것은 우리가 무엇이 더 옳은지 확신할 수 없는 선택을 직면할 때이다. 우리가 우리의 선택에 의심을 품지 않을 때는 그 선택이 결정된 것인지 자유의지의 발현인지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는다. 선택 앞에서 망설일 때 우리는 스스로가 필연의 흐름을 벗어나 자유로운 위치에 있다고 느끼고, 그 자유는 고통이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자유의지를 숙명으로 바꾸어 줄 수 있는 어떤 것, 우리의 선택을 결정지어 줄 수 있는 어떤 힘을 바라게 된다. 충동이든, 믿음이든, 우연이든, 무엇인가가 우리를 자유로부터 구원해 주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결정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먼저 우리는 책임의 중압감을 잠시 내려 놓고 우리의 선택을 서로 모순되는 방향에서 떠미는 여러 힘들을 결정론자의 관점에서 한 발 떨어져 바라보면서, 그 힘들에 대한 정보와 지식들을 수집할 수 있다. 내가 가진 믿음들, 취향들, 다양한 상황에 내 마음이 반응하는 방식들에 대한 지식들이다. 그러한 지식들이 쌓여갈수록 우리는 우리의 숙명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또는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선택 중에서 정말 중요한 몇 가지에만 마음을 모으고, 다른 것들은 직관에 의존하든 주사위를 던지든 한 방향을 편드는 힘들에 올라 타 버리는 방식으로 부담을 줄일 수 있다. 마음을 모을 정말 중요한 선택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문제가 남지만 이 역시도 직관의 도움을 받아 판단할 수 있다.
이러한 직관은 우리가 마음의 힘을 쓰면서 끌고 나가는 논리적 사고와는 다른 것이며 결정론의 인과를 통해 형성되어 온 우리 자신의 모습, 즉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숙명의 즉각적인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로서 갖는 부담이 결정론이 선물해 준 숙명의 도움을 받아 적당히 가벼워질 때, 우리는 어느 정도 삶을 삶 그 자체로서 누릴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