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부재라는 보편적 상황

선택에 필요한 지식은 항상 부족하다.

by 황인석

앞의 글들에서 나는 자유와 선택의 문제에 대해 여러 번 다룬 적이 있다.

자유는 상당 부분 선택의 갈등이라고 하는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외적 구속에 대해서는 의연하게 대처 방법을 찾을 수 있고, 그런 방법을 찾아 실천해 나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요 자유의 표현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선택의 갈등은 우리를 함정에 빠진 듯 어디로도 갈 수 없는 형국으로 몰리게 하고 우리가 가진 자유(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 인해 자유(선택이라고 하는 과제에 구속당하지 않은 채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자유)를 잃어버리는 역설적 상황을 만든다.

선택의 갈등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지식의 부재이다. 다시 말해 선택의 갈등은 우리가 선택을 하는 데 충분한 지식을 갖지 못한다는 상황에서 비롯된다.


물론, 지식의 부재가 모든 갈등의 유일한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자면, 어떤 것이 옳은지를 알면서도 충동이나 두려움 등으로 인해 그것을 선택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종류의 갈등에 대해서는 다른 이야기들이 필요할 것이지만 이 글에서는 지식의 부재라고 하는 요인에 집중하려고 한다. 다만, 이성과 감정의 갈등의 경우에도 지식의 부재가 한 요인으로 몫을 보태고 있다는 것, 즉 단지 절제력의 부족 뿐 아니라 이성이 이야기하는 논리적 결론을 따르는 것이 좋은지 감정과 직관을 따르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의심이 갈등에 역할을 한다는 것만 언급해 두고자 한다.

한 가지 더 언급을 하자면, 지식의 부재가 아니라 새로운 지식의 등장이 갈등을 새로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존재하는지 몰랐던 기회에 대한 새로운 정보와 지식, 또는 기존에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취해왔던 방침에 문제가 있다는 깨달음은 추가적인 지식을 통해 없었던 갈등을 일으키거나 약했던 불안을 증폭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엄격하게 말하자면,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은 지식의 부재 자체라기보다 선택에 필요한 지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하는 자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더 나아가서 생각을 해 보자면, 삶이 선택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즉 선택과 갈등이 삶의 보편적이고 핵심적인 요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지식의 부재는 우리의 삶에 무수한 측면의 영향을 미치는 보편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검정을 느끼고 어떤 행동을 결정하고 실천하는 삶의 모든 과정에서 우리가 항상 마주치게 되는 상황이고, 우리의 사는 방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삶의 의미에 대한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믿음들을 갖고 살아가며, 이런 생각들은 수시로 호출되어 판단과 실천에 적용된다. 즉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삶의 의미는 행복에 있다거나 새로운 경험에 있다거나 하는 무의식적 판단 기준들이 환기되어 적용되기도 하고, 내게 일어난 일이 내가 생각하는 삶의 의미에 부합하는지 여부에 대한 인식에 따라 그 일의 의미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처한 현실은, 삶의 의미에 대해서 이런저런 전제만 할 수 있을 뿐 궁극적인 삶의 의미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갖고 있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지식은 불충분한 상태를 면하지 못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은 무지의 바다에 둘러싸인 섬과 같아,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듯 결국 더 나아갈 수 없는 지점을 마주치게 된다. 우리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알고 있지만 정작 중력이라고 하는 것이 왜 존재하는지, 그것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공간을 넘어 세상 만물에 적용되는지 모른다. 원자는 한때 쪼갤 수 없는 궁극의 입자로 여겨졌지만 전자와 양성자 등으로 구성된다는 것이 밝혀졌고, 지금은 그보다도 더 작은 미립자들에 대해 알고 있지만 입자와 파동을 오고 가는 그들의 존재 방식은 우리가 직관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다.

우리는 스스로 결정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면서 정의가 무엇인지 묻고 그에 대한 나름의 믿음에 따라 판단을 내린다. 그렇게 해서 가급적 함께 만족할 수 있고 스스로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결과를 가져오길 기대한다. 하지만, 궁극적 의미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공정함이란 무엇인가? 세상에는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이 있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과 고립되고 고독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모두 정당한 몫을 누리는 것일까? 정당한 몫이란 무엇일까? 사회는 더 정의롭게 바뀌어야 하는 것일까? 어떤 것이 더 정의로운 것일까?

도덕철학자들도 어려움을 겪는 문제이지만 우리 같은 일반인이 일관성 있는 결론을 갖기는 힘들다. 그런 상태이지만 우리는 정의롭기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한다.


지식의 부재라는 현상은 어딘가에 존재하는 지식이 필요한 곳에 있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일 수도 있고, 지식의 본질적인 특성에서 비롯되는 현상일 수도 있다.

전자의 의미에서 예를 들자면, 코페르니쿠스와 뉴턴 이전 시대의 사람들은 천체의 운동원리에 대해 지식이 부족했고, 2차세계대전 이전의 사람들은 파시즘의 위험에 대해 충분히 몰랐다. 또한 우리 각자는 시간과 자원이 부족하거나 어디에 어떤 지식이 존재하는지 모르거나 선행 지식이 부족한 등의 이유로 필요한 지식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다.

후자의 관점에서 지식의 본질적인 한계를 생각해 보자면, 앞에서 예로 든 것처럼 의미와 가치에 대한 지식은 온전하게 구성되지 못한다. 또한 언어로 표현하고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각자가 가진 직관과 신체화된 지식, 예를 들자면 테니스를 치는 방법이나 무의식적으로 여러 정보가 결합되어 내리는 판단, 정서적인 경험에 대한 기억과 환기 등은 순간적으로 뇌 안에 무수한 신경 세포들의 점멸이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존재하다가 사라질 뿐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한 점멸 현상을 충분할 정도로 기술하거나, 그러한 현상의 기반이 되는 신경세포들 간의 연결 형태를 언어로 온전하게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어적 표현이 불가능한 지식은 우리의 삶과 선택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지만. 그런 지식을 다루는 우리의 능력은 한정되어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실재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눈과 뇌가 협력하여 구성한 세계에 대한 이미지다. 우리는 세계로부터 받아들이는 추가적인 신호들과 그 이미지를 비교하여 우리가 가진 지식을 변경해가며 실천의 근거로 삼는다. 하지만 근본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가진 지식들은 우리가 세계에 대해 구성한 것이지, 세계 그 자체를 사진처럼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지식들에 대해 일관성을 검토하고 예측과 피드백을 비교해 가면서 신뢰성을 변화시켜 갈 수 있지만, 항상 한계는 존재하게 마련이다.


우리가 가진 지식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지식들은 서로가 서로의 근거와 결론이 되어 준다. 그런 지식들의 체계에 의존하여 우리는 이해하고 판단하고 선택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추궁을 받는 아테네의 현자들처럼, 우리가 가진 지식들의 의미와 근거를 설명하지 못하는 지점을 만나게 된다. 끊기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지식의 그물망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 지점과 채워지지 않는 구멍들을 갖는다. 결국 우리의 지식이란 우리가 참으로 가정한 전제들의 기반 위에 세워진 건물과 같다. 우리가 의지하는 건물은 단단하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모래 위에 세워진 것이다.

하지만 그 건물이 없으면 우리는 머물 곳이 없고 살아갈 수가 없다. 우리가 가진 모든 지식을 의심하는 사람, 끝까지 속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길을 잃는다.


선택에 직면해 관련된 정보들을 수집하는 노력과 더불어 적절한 수준의 고민(선택에 관련된 정보와 지식을 검토하고 정비하려는 노력)은 선택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결국 선택은 그런 정보와 지식이 온전히 채워지지 못한 상태에서의 결단을 요구한다.

정답은 없다. 우리는 지식의 부재를 인식하고 겸손과 신중함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지식의 부재 상황을 받아들이고 긍정하면서 비약을 감행하는 용기와 과감함을 가져야 한다.

또한 과학자들처럼 기업의 경영에 대한 혁신 전문가들의 조언처럼 가설 기반 접근 방식을 취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믿음들을 잠정적인 가설처럼 여길 수 있다. 가설들을 그 신뢰도에 따라 예외가 없는 법칙이나 개연성 있는 이론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면서 우리의 지식을 조정해 나갈 수 있다. 다른 지식을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 관용과 경청의 자세를 가지면서도 한계를 가진 우리의 믿음에 충실하고 의연한 태도를 가질 수 있다. 그러면서 우리 믿음에 어긋나거나 그 틀을 넘어서는 지식의 출현에 대해 불안을 가라앉히고 개방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다.

그러한 지식의 출현은 해방적인 효과를 갖는다. 우리는 우리의 지식 안에 갇혀 있고 그 구속에 의지하여 살 수밖에 없지만, 지식의 경계는 변화하고, 하나의 경계를 넘어서면서 우리는 일시적인 초월과 해방을 경험한다. 해방은 지속되지 않지만, 하나의 해방이 가라앉을 때 새로운 해방의 가능성이 떠오른다.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지식의 부재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더 합리적이라고 역설하지만, 복잡한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지식들에는 결핍된 구멍들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한 과학과 합리로 메꿀 수 없는 부분들을 채워주는 ‘가상의 지식’들이 필요하다. 그런 지식들을 이데올로기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각자의 삶의 고유성은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갖게 한다. 정치적, 사회적 결정들은 이러한 이데올로기 간에 투쟁과 타협으로 이루어진다. 합리적 숙의의 이상은 존중받아야 하겠지만, 사회적 결정에도 삶의 결정과 마찬가지로 디딜 곳 없는 상황에서의 비약은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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