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욕을 지향해야 하는가?

욕망과 무욕의 변증법

by 황인석

무욕은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런 가르침에 동의한다.

그건 마치 술을 마시고 다이어트를 하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것에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무욕이 좋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일종의 윤리적 지침 내지는 삶의 좋은 지혜처럼 무욕을 간주한다.

무욕을 뒷받침하는 논리 중 하나는 분수의 공식이다. 즉, 욕망의 달성을 분자로, 욕망을 분모로 하는 분수가 만족이기 때문에, 만족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는 분모를 줄이고 분자를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논리를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분수로 계산하면 같은 값이라도, 많이 욕심을 내고 많이 이루는 것은 적게 욕심을 내고 적게 이루는 것과 다르지 않을까? 분수로 표현되는 만족이라는 것이 과연 최고의 가치일까? 욕심이 적기 때문에 만족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가 아닐까? 많은 것을 욕심내면서 많이 기뻐하고 좌절과 슬픔도 많이 느끼는 역동적인 삶이 식물처럼 고요한 삶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앞에서 무욕을 다이어트에 비교했지만, 다이어트는 사람들이 열망하는 욕망의 대상인 반면 무욕은 현대인들이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덕목인 것 같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의 역동성은 자본을 증식시키고 더 많은 이윤을 성취하려는 동기를 핵심 동력으로 삼는다. 더 많은 소득을 얻고, 자산을 증식시키고, 더 많은 소비와 향락을 누리려는 사람들의 열정과 의욕이 없다면 사회는 그 활력을 잃지 않을까? 꿈과 열정의 가치를 강조하는 현대에 무욕이라는 지향은 설 자리가 좁아 보인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여전히 무욕의 가치가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나는 자연인이다’와 같은 TV 프로그램에서 보여 주는 소박한 삶의 모습, 쿵푸팬더나 주성치의 영화 등에서 욕망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 이너피스(내면의 평화)를 이루고 그 바탕에서 자기 자신과 상대를 이기는 역량이 발휘된다는 클리셰, 애플 제품들의 디자인과 같이 복잡한 현대인의 삶에서 필수적인 것들에만 집중하고 번잡한 부분을 최소화하려는 미니멀리즘의 경향 등이 몇 가지 사례들이다.

욕망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은 이유는 한편으로는 그 욕망이 타인을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것이라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욕망이 집착, 불안, 두려움, 비관, 질투와 같은 여러 부정적 감정의 원인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꿈과 욕망은 다같이 어떤 것을 이루거나 얻고자 하는 바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꿈은 긍정적인 것으로, 욕망은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일까? 그 두 가지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있을까? 어떤 소원이 꿈인지 욕망인지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

어쩌면 무엇을 바라는지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 바라는지일 것이다. 어떤 대상을 바라는 마음은 의욕으로, 설레는 희망으로, 노력하고자 하는 의지로 전환될 수 있는 반면, 집착으로, 불안으로,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불만과 비관으로, 좁은 시야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원망이나 폄하로도 이어질 수 있다.

우리가 무욕의 가치에 끌리는 이유 중 하나는 무욕을 통해 얻게 될 자유와 평안에 대한 욕구 역시 우리의 강렬한 욕구 중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소망을 내려놓는 과격한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남는 대안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추구하면서도 자유와 평안을 잃지 않는 방식으로 바라고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타협적인 방식은 불교나 도가의 제자들이 추구하는 경지에는 부족함이 있어 보이고, 그들의 철학을 그들의 관점에서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이 방향으로 나아가 보려고 한다.

요약하자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되, 그에 집착함으로써 일어나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고 자유와 평안을 유지하거나 증진시키는 방식으로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한 가지 생각할 부분은 욕구와 욕망의 구분이다. 욕망은 어떤 구체적 대상을 향한 욕구라고 할 수 있다. 욕구는 우리의 보다 항구적인 요소인 반면 욕망은 그 욕구가 특정 대상을 향하는 상태이고 변화의 여지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배고픔은 먹는 것에 대한 욕구를 일으키지만, 그것이 짜장면이나 스테이크 같은 구체적 대상을 향한 욕망으로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욕망을 가질 때에는 그 대상에 무척 중요한 가치가 있고 대체불가능한 대상으로 여기기 쉽지만, 어떤 계기로 그 욕망이 다른 대상으로 전환되면 우리는 애초의 대상에 대해 잊어 버리고 새로운 대상에 집중한다. 반면 욕구는 상대적으로 더 지속적인 성향을 가진다.

욕망은 대상을 향하지만, 그 대상을 취하는 순간 일시적인 만족감을 남기며 사라지거나 약해진다. 이것은 하나의 역설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바라지만, 바라는 것을 원하는 순간 그 바램이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가 욕망을 가질 때는 그 대상에 가치가 있다고 믿지만 그 대상을 얻는 순간 가치는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어떤 자산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사라져버리고 만다.

사람들은 어떤 상황이 일어날 때의 자신의 행복이나 불행감이 어떨 것인지에 대한 상상과 예측을 하지만, 그런 상상은 실제로 경험하는 것과 차이가 나기 쉽다. 인간에게는 적응하는 성향이 있어서, 어떤 변화로 인해 일시적인 행복감이나 불행감을 느끼더라도 그 변화에 익숙해지면서 그런 감정들도 희미해지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부러워하는 만큼 행복하지 않고, 불행하다고 동정하는 사람들은 그보다는 덜 불행한 경우가 많다. 객관적인 상황에 대한 예측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느끼게 될 감정들이 어떨지에 대한 예측은 실상에 부합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오히려 우리의 경험은 욕망의 대상에 가 닿는 순간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더 풍부한 듯하다. 월드컵 경기에서 우승하는 순간의 기쁨은 크겠지만, 그 기쁨을 누리는 것은 참여자 중 소수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참여자는 이루어질 확률이 낮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얻는다. 심지어 우승자조차도 우승의 기쁨보다 더 많은 의미들을 우승으로 향해 가는 과정에서 얻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어떤 욕망이나 욕구를 가질 때 그것을 충족하는 일이 무척 중요하다는 강한 확신을 갖는다. 우리의 감정과 정서는 그 확신을 강하게 지지한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따지다 보면 그런 욕망이나 욕구의 충족이 왜 중요한지 모호할 때가 많다. 어떤 음식에 대한 열망은 배고픔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중요성을 잃지 않겠지만, 단지 배고픔을 충족시키려는 것이 아닌 맛있는 음식을 먹고자 하는 욕구는 얼마나 큰 가치를 갖는 것인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우리가 가진 대부분의 욕구가 그러하다.

많은 욕구는 생리적인 조건에 의해 자연히 따라나온다기보다 우리가 삶을 기획하고 설계하는 틀 속에서 의미를 부여받는다. 맛있는 음식에 대한 욕구는 직업적인 소믈리에, 미식을 자신의 중요한 취미로 여기는 사람, 아니면 그냥 자기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걸 중요하게 여긴다고 믿는 사람, 음식은 건강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면 충분하다고 믿는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의미를 갖는다. 신체적인 차이에서 비롯되는 차이도 있겠지만, 우리의 인생관, 경험, 우연한 계기 등에서 비롯되는 인식들이 그러한 차이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우리의 욕구를 무척 다양한 방식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것들을 고려하면, 우리가 우리의 욕망과 욕구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를 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무욕이라는 지향으로는 한편으로 지혜를 담고 있고 도움이 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는 않아 보인다.

무욕에 관점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들은, 욕망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경향이 그 의미를 과대평가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욕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어길 수 없는 지시를 받는 존재인 것처럼 스스로를 느끼지만, 욕망은 그 자체로 독립된 에너지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과 상호작용하며 형태를 계속 바꾸어가는 대상이다.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고 목표와 계획을 설정하는 방식에 따라 우리의 욕망은 그 대상과 성격을 달리 한다. 또한 특정한 욕망이 가져오는 고통과 여러 부정적 효과들을 벗어난 자유 역시 우리의 중요한 욕구가 될 수 있으며, 그러한 자유는 우리가 가진 욕구들을 실현하는 데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욕망의 역설적이고 무상한 성격, 즉 현재 느껴지는 생생함과 달리 그 일어남과 사라짐과 대상을 바꾸는 변화가 계속 일어나고 장기적으로는 그 기반을 이루는 욕구의 성격조차 달라져 간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부정적인 효과들을 가져오는 집착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욕구들을 진지하게 여겨야 한다.

자크 라캉이 말한 “너의 욕망을 타협하지 말라”는 격률에는 깊은 공감을 일으키는 울림이 있다.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사회에 통용되는 윤리와 사람들의 시선이 있고, 자기 마음 속의 다양한 욕망이 일으키는 갈등이 있고, 수시로 마음이 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혼란이 있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욕망을 추구하는 데에는 수많은 장애 요소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거나 타협하라는 유혹과 압박을 이겨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욕망은 무상하지만, 우리가 욕망을 붙잡지 않으면 닻을 내리지 않은 배처럼 정해진 방향 없이 흘러 가게 된다.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간다는 보장은 없지만 우리는 삶을 설계하고 기획하면서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가 설정한 목적지가 다른 목적지보다 낫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항해에 헌신해야 한다. 우리는 얻을 수 있는 대부분의 것들을 목적지가 아니라 항해의 과정에서 얻게 될 것이지만, 그러기 위해선 헌신이 필요하다. 우리가 선택한 욕망에 내기를 걸어야 한다.

어쩌면, 사막은 그 안에 보이지 않는 오아시스를 품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와 보인다고 한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가 한 말처럼, 우리가 열망하는 대상들을 품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의미로 충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꿈을 꾸는 일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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