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을 언어로 정의하는 것의 한계

왜 우리는 충분히 논리적이 될 수 없는가?

by 황인석

논리의 법칙들을 떠올려 보자.

가장 대표적인 논리 중 하나인 삼단논법은 ‘A는 B이고 B가 C라면 A는 C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 때 A가 B라고 하는 의미는 A가 어떤 특성을 갖는다거나 어떤 집합에 속한다는 것 등을 의미한다. 또한 A가 B이면서 동시에 B가 아닐 수 없다고 하는 모순율이 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논리 법칙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논리 법칙들이 실제로 적용되기 위해서는 A나 B와 같은 개념들의 정의가 명확해야 한다. 예를 들어 A라고 하는 단어가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면, A가 B이면서 B가 아닐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철이라는 사람은 용감하다, 하지만 용감하지 않다’ 라고 하는 문장은 논리적 모순처럼 보이지만, 용감하다고 하는 말의 정의가 모호하다면 말이 되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소설가와 시인을 비롯해 역설을 즐기는 사람은 이런 모순적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영웅들은 위대한 인물인 동시에 비열한 악당들이고, 연인들은 서로 사랑하면서 미워한다. 현명한 사람들은 아는 것이 없고, 추한 것이 아름다운 예술이 되기도 한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이런 것들을 교정되어야 할 혼란으로 볼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철학의 역할은 개념의 의미를 명확하게 만들어 참과 진리를 판별하는 데 혼란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개념들은 경험에 의해 검증 가능해야 하고, 모호하거나 다수의 의미를 가져서는 안된다. 한 단어가 가진 여러 의미들은 동음이의어로서 명확히 구분되어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밤이 어두운지 고소한지를 알기 위해서 먼저 밤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 명확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용감하다, 비겁하다, 사랑한다, 미워한다, 현명하다, 추하다 같은 개념들이 명확히 정의된다면 더 명확한 사고와 소통이 가능할 것이다. 과학 분야에서 적용되는 엄격한 개념 구조가 다른 영역에도 확산되어야 하며, 그럴 수 없는 명제들은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는 가치와 믿음의 영역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충족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그런 엄격한 정의를 내리면서 사고하고 대화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는 어떤 단어의 의미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따져 보아야 한다.

어떤 단어들은 외부의 특정 대상들과 일치가 되는지 여부로 의미가 판별된다. 사과라는 단어는 사과라고 부를 수 있는 대상들의 집합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람, 남자, 여자, 동물, 의자, 가구 등 많은 단어들이 그렇다. 하지만 다른 많은 단어들은 그런 일치가 어렵다. 용기, 사랑, 정의, 선, 악과 같은 단어들이다.

우리가 개념들의 정의를 정교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의미의 혼란을 줄일 수 있을까?

분명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을 용감하다고 말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이 서로 논쟁을 벌이는 경우 각자가 생각하는 용감하다는 말의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혼자서 그와 비슷한 평가를 내리기 위해 생각을 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내가 생각하는 개념들의 정의를 되돌아보는 것은 사고를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몇 가지 어려움이 따른다. 먼저 용기나 자유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의 경우에는 물리적인 대응물을 가리키는 단어들과 달리 명확한 정의가 어렵다.

용기라는 개념의 예를 들어 보자. 용기가 가치있는 것을 얻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마음을 가리킨다고 대략 정의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어떤 사례가 용기에 해당하는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격정에 눈이 멀어 가능성이 없는 위험을 생각하지도 않는 채 행동하는 경우도 있고,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마지못해 하는 경우도 있으며, 위험의 존재를 의식하면서도 개의치 않고 호탕한 태도로 나아가는 경우도 있다. 위험의 종류도 신체 상의 위협, 옳고 그름이 불분명한 경우에 감수해야 하는 윤리적 위험, 결과의 불확실성과 그에 따른 손실의 가능성 등 다양하다. 이 중에서 어떤 사례를 용기로 여기고 다른 사례는 그렇지 않은지, 어떤 사례들을 더 용기의 전형적인 사례로 여길지는 사람마다 다르고 공통의 명확한 합의가 존재하기 어렵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철이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와 같은 명제는 참과 거짓으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철이는 신체적 고통에는 민감하지만 불확실성에는 별로 개의치 않고 과감하게 결정하는 사람일 수 있다. 자신의 일에는 과감하게 결정하지만 윤리적 사안에는 매우 신중하고 주저하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용기가 있다, 없다를 단정지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철이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용기가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와 같은 명제가 오히려 더 정확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시간에 따른 변화까지 생각한다면, ‘철이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 되었다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가 한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식의 명제들은 별로 활용 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모호한 명제들을 빼고 정확한 의미를 갖는 문장들만 말해야 할까? 예를 들어, 용기가 있다는 표현은 특정 행위를 주어로 할 수는 있어도 특정 사람을 주어로 해서는 안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진위 여부를 명확히 판단할 수 있는 명제만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의미가 부정확한 명제들을 갖고 논리를 전개해 나가면서 새로운 결론들에 이르고 그 결론에 따라 행동한다. 의식적인 논리의 전개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떠올리는 명제들은 우리의 직관과 상호작용 하면서 사고를 밀고 나간다. 논리적 진위가 분명한 명제들만 남기고 모호함을 갖는 개념들을 다 제거하려 한다면 우리는 제대로 사고할 수도 대화할 수도 없게 된다.

우리는 철이가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는 판단을 내리기도 하고, 스스로 더 용기 있는 사람이 되자는 결심을 할 수도 있다. 이런 문장들의 더 정확한 의미를 정의할수록 철이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때나 용기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더 구체적인 지침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떤 개념의 의미를 말과 논리로 온전하게 정의내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엘리노어 로쉬의 원형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개념을 언어로 표현되는 정의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범주에 속한다고 여겨지는 사례들을 종합한, 전형적이고 뭉뚱그려진 이미지(원형)로 이해한다. 예를 들어 새라는 개념을 생각할 때면 날개와 깃털이 있고 두 다리를 가진 전형적인 새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참새와 펭귄은 다 같은 새이지만 새의 원형 이미지와의 거리는 서로 다르며, 보통 사람들은 참새를 펭귄보다 더 새의 원형에 가깝다고 여긴다. 그처럼 용기와 같은 개념들도 여러 명시적 조건들로 한정지어지기 이전에 직관적인 이미지로서 파악이 된다. 우리의 사고는 그와 같이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개념들의 연쇄와 조립으로 진행되고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새는 물리적 개체들을 종합한 개념이지만, 용기와 같은 추상적 개념들도 그런 이미지로 이해된다고 할 수 있을까?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는 문구로 유명한 조지 레이코프와 마크 존슨은 우리가 가진 추상적 개념들이 우리의 신체적 경험에서 확장된 은유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공간적인 가까움의 경험이 친밀함의 개념으로 확장되고, 물건을 고친다는 개념이 개선한다는 개념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가진 개념들은 비유적 이미지와 특정의 구체적인 사례들, 또는 사례들을 종합한 원형 간의 연결을 통해 이해되고 활용된다. 용기라는 개념은 사람들이 그 개념에서 떠올리는 것들의 총체로 구성되는 것이고, 그 자체의 고유한 의미로서 말로 정의된 내용은 부수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용기의 사전적 정의보다도 창을 든 적의 보병들을 향해 돌진하는 기병, 불확실한 결과를 예상하려고 애쓰며 사무실에서 혼자 고민하는 CEO, 거절당할 것을 감수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하는 연인 등 직접 경험하거나 소설과 영화 같은 매체에서 본 이미지들이 우리가 가진 용기의 개념을 구성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고는 그렇게 연결된 이미지들을 오고 가면서 진행되어 어떤 판단이나 결심에 이르게 된다.

요약하자면, 우리의 사고를 구성하는 개념은 온전히 논리로 풀어낼 수 없다. 너무 많은 노력이 필요할 뿐더러 불가능한 한계의 지점들 또한 존재할 것이다. 대신 개념은 우리의 직간접 경험에서 학습된 다양한 사례들과의 연결, 이들이 뭉뚱그려진 원형의 이미지, 우리의 신체적 경험에서 확장된 은유적 연상들로 구성된다. 개념이란 우리가 직관적으로 떠올리고 연상하는 것들이며, 다른 개념들과 연결되어 사고와 행동을 진전시키는 기반 역할을 한다는 것에 그 용도가 있다. 그러한 진전은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개념들 간의 연결과 비약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언어적 정의와 논리적 규칙들은 부수적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각자가 가진 개념들은 소통을 위한 공통점을 갖는 것과 동시에 개인마다 고유한 특성들을 갖는다. 논쟁의 대상이 되는 명제들은 논리를 통해 온전히 참이나 거짓으로 증명되지 못하고 고유한 직관들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 각자가 가진 개념들을 구성하는 직관에 대해 서로의 이해를 개선할 수 있다. 그러한 유용성에 비한다면 논리의 비교 분석을 통해 합의할 수 있는 진실에 도달한다는 것은 무척 어렵고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의 사고와 판단과 믿음은 논리와 직관의 종합으로 형성된다. 논리는 우리의 생각들이 참 아니면 거짓이라는 착각을 갖게 하지만, 현실 속의 우리는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면서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끊임 없이 작용하는 직관과 무의식적 논리의 흐름 속에 살아 간다. 그 흐름을 구성하는 개념들은 경험을 통해 풍부해지고 확장되고 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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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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