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아는 존재하는가?

플라톤의 이데아론 비판

by 황인석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동굴에 묶인 죄수의 비유. 현실과 별개로 존재하는 진짜 세상, 이데아의 세상이 따로 있고, 현실은 그 불완전한 그림자다. 중심에서 동일한 거리의 점으로 이루어진 원이라고 하는 이데아의 그림자로, 시계, 통나무단면, 얼굴과 같은 현실의 불완전한 원들이 존재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고양이의 이데아, 인간의 이데아, 정의의 이데아, 선의 이데아, 아름다움의 이데아가 존재한다. 이러한 이데아는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기하학자가 원의 개념을 알듯이, 이성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세계에 대한 설명이 그럴듯하게 들리는가?

일리가 있어 보이는 점들을 찾아보자면, 수학과 자연과학의 이론에는 적용될 수 있어 보인다. 이데아의 세계에는 뉴턴의 역학과 같은 개념과 법칙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법칙들이 그대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고, 공기의 부력이나 마찰 등 다양한 원인들로 인해 불완전한 형태로 구현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데아의 세계에서 쇠공과 깃털은 함께 떨어지겠지만 현실에선 쇠공이 먼저 떨어진다. 이런 현상의 세계만 보는 사람들은 무거운 물체가 빨리 떨어지는 것으로 알겠지만, 이성을 잘 사용하면 낙하속도가 질량에 무관한 이데아의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자세히 들여다 보면 무리가 있어 보인다. 뉴턴의 역학 법칙이 현실에 그대로 구현되지 못못하게 만드는 마찰력이나 부력에 관한 자연법칙들은 뉴턴의 역학 법칙보다 덜 이데아적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현실의 수많은 물체에서 뽑아낸 질량, 에너지, 힘 등의 공통된 요소들은 이데아라고 부를 수 있지도 않을까? 그것도 좀 이상하다. 질량과 같은 요소들은 여러 물체에 공통된 속성이지, 그 물체들의 이데아가 아니다. 질량이 이데아라고 한다면, 그 이데아가 현실에 드리우는 그림자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 뭔가 깔끔하게 설명이 되지 않는다.

진공에 가까운 우주 공간에서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만으로 정확한 예측이 가능한 궤도를 따라 천체들이 움직이는 모습은 이데아의 세계에 가까와 보인다. 하지만, 비바람 속에 떨어지는 낙엽 한 장이 복잡한 궤도를 따라 예측 불가능하게 움직이는 모습도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하다. 우리가 ‘이데아적’인 것과 ‘현실적’인을 구분하는 방식은 세계의 참된 구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인식에 연관된 것이 아닐까? 우리가 갖고 있는 간결한 지식으로 추상화가 가능한 세계의 측면을 이데아라고 부르고, 이해하기가 어렵고 복잡한 요소들이 함께 작용하는 세계의 측면을 이데아의 그림자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다른 예들을 더 생각해 보자. 색채의 다양함은 빛의 파장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빛과 색채들은 현실,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의 파장은 이데아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 인지하는 세상의 모습 너머에 그 현상의 세계를 통제하는 추상적 세계의 법칙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데아 세계관과 잘 들어 맞는 듯 보인다. 아마 이데아론의 효용이 있다면, 그처럼 감각 너머의 세상의 법칙에 대한 상상의 계기가 되어 줄 수 있다는 것일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눈 앞에 보이는 파란색보다 파란색의 파장이 대략 450~495 나노미터 범위에 해당한다는 것이 더 참된 실재라고 볼 수 있을까? 우리가 기술적으로 파란색을 다룰 때, 예를 들어 TV 같은 매체로 파란색을 구현하려고 하거나 도플러 효과처럼 현상의 깊은 원인을 설명려고 할 때 파장에 대한 지식은 도움이 된다. 그렇지만, 파란색이 인간에게 불러 일으키는 효과, 연상들, 문화적 의미 등을 이해하고 활용하려고 할 때, 예를 들어 예술가가 그림 속에 파란색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고민할 때와 같은 경우에 파장에 대한 지식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눈에 보이는 파란색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의 파동이 ‘참된’ 세계에 속한 것으로 볼 근거는 무엇일까? 참되다는 것은 무엇일까?

정의나 선, 아름다움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한층 더 어려움이 심한 것 같다. 이런 개념들은 인간의 인식과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인식과 독립적인 참된 이데아가 존재할 수 있을까? 그보다는 여러 사람들의 공통적 인식이 개념의 기반이지 않을까? 한 사람이 힘센 사람이 많이 차지하는 것이 정의라고 하고, 한 사람이 약자를 포함해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정의라고 하고, 세상에 그 두 사람밖에 없다고 하면 정의의 이데아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처럼 논리적인 문답 끝에 하나의 의견이 근거가 없거나 자가당착에 빠진다는 것이 드러나고 다른 하나의 의견은 그렇지 않다고 드러날 수 있다. 하지만 논리적 사고력이나 시간과 의지의 부족과 같은 현실적인 이유들로 그런 합의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고 충분히 노력해도 서로를 배척하는 주장들이 다른 하나를 온전히 물리치지 못한채 병존할 수도 있다. 그러한 경우 개념들의 이데아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데아 이론은 과학의 발전에 있어 그 나름의 기여가 있을지 몰라도,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납득할 점이 별로 없어 보이고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그다지 필요가 없는 것 같다. 굳이 이데아를 전제하지 않아도, 우리는 현상과 그 이면의 법칙을 구분하는 일에 익숙하고 실제를 추상화한 모델의 가치와 활용법을 안다.

이데아론은 오히려 완전한 이상의 존재를 가정하고 실재처럼 믿는 경향을 부추김으로써 악영향을 미치기 쉽다. 원형이론에서는 참새가 펭귄보다 ‘새’라는 범주를 대표하기에 적절함을 주장하지만, 그렇다고 참새가 펭귄보다 ‘새’로서 우월하다거나 이데아에 가깝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펭귄이 열등하거나 비정상적인 종족인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특성을 공유하는 친족의 외모 중에 전형적인 외모는 있더라도 그것이 이데아는 아니다. 하지만 이데아론에서는 완전한 이데아를 가정하고 그로부터의 거리로 현실의 대상들을 평가한다. 이는 인종을 비롯한 차별적 사고의 기반이 되기 쉽다.

우리는 ‘~다움’을 중요한 미덕으로 여긴다. 군인은 군인답게 용감하고 절도가 있어야 하고, 리더는 리더답게 믿음직스러워야 하고, 공무원은 공무원답게 청렴하고 양심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물론 인간은 인간다와야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다움’들은 어떻게 규정되는 것일까? 각각의 정체성에 해당하는 이데아가 있다는 전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러한 이데아는 각 개인을 소속이나 객관적 정체성에 따라 스스로를 규정하도록 강제하는 억압으로 작용하지는 않을까? 예를 들어 ‘남자다움’이나 ‘여자다움’이라는 가치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나는 ‘이데아’, 또는 ‘완벽한 이상상’의 개념이 우리의 인식 과정에서 굳이 필요하지 않으면서 부정적일 수 있는 잡음을 일으킨다고 본다. 어떤 직분에 요구되는 미덕의 존재를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리더에게는 훌륭한 리더가 되기 위해 필요한 여러 덕목과 역량이 필요할 것이다. 어떤 지향하고 싶은 롤모델에 맞춰 자신을 조정하려는 것도 괜찮은 시도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데아를 가정하고 이데아와의 거리를 통해 자신을 포함한 대상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폭력적인 일이다.

정의나 아름다움과 같은 가치도 마찬가지다. 이런 개념들을 명확하게 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유용하고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떤 정의를 내리든 그것은 잠정적인 지향을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 불확실한 개념들에 대한 믿음인 것이지, 우리의 판단을 정답과 오답으로 판별하는 기준이 되는 이데아가 실재한다고 믿는 것은 착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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