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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9-

9화. "좀. 그래서요."

by 동노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9화. "좀. 그래서요."



2부.


9.


자리로 돌아왔을 땐 팀장님의 조카가 보이지 않았다. 팀장님도 별말이 없는 걸 보니 유야무야 잘 넘어간 것 같다. 다행이다. 정신과 진료 예약을 해야겠다. 터덜터덜 걸어와 자리에 앉는다. 정신과를 검색한다.


"오빠. 이계성 할머니 문제는 해결한 거야? 아까 행운병원에서 전화 왔어. 바로 회신 달래. 내가 어떻게든 처리하려고 했는데, 개인정보 관련해서 문제 된다고, 입원 관련 서류에 서명했던 공무원이 직접 전화 달라고 하더라고. 미안해."


정신과 예약은 글렀다. 내 개인정보는 이렇게나 많이 유출됐는데 왜 이계성 할머니 개인정보만 소중한 걸까. 참 알다다고 모를 세상이다. 수진이가 메모해 둔 병원 담당자의 전화번호를 꾸욱꾸욱 누룬다.


"안녕하세요. 강병1동 주민센터입니다. 전화 주셨다고 해서 회신 드렸습니다. 이계성 할머니 건으로..."

"안녕하세요! 행운병원 원무과예요. 혹시 할머니 가족분이랑 연락이 되셨을까요? 상황이 좀 급해서요."

"죄송합니다. 일단 가족과 연락은 된 상태인데. 그... 제가 지금 바로 가족하고 다시 전화 해보겠습니다. 저희도 개인정보보호법 상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사정이 좀 있어서요."

"개인정보... 그렇죠. 하여튼 최대한 빨리 부탁 좀 드릴게요. 저희도 바쁘고 이계성 할머니 상태도 생각보다 심각해서요."

"네. 확인하고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행여나 상대가 먼저 전화를 끊을까 냅다 전화를 먼저 끊는다. 훗. 그래도 개인정보로 역습에 성공했다. 짜식들. 어딜 감히 공무원 앞에서 개인정보를 운운해. 승리감에 취해 메모 해두었던 이계성 할머니 자녀의 전화번호롤 응시한다. 이계성의 혈육이여. 너도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을 거다. 기필코 가족에게 이계성 할머니를 넘기고, 나는 로또에 당첨될 거고, 행정고시에 합격해서 출세가도를 달릴 거다. 근데 실현가능한 계획일까. 에이씨 뭐 어때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오빠!"

"깜짝이야. 애 떨어진다. 수진아. 왜 소리를 지르니. 나의 후배 수진아."

"전화나 받아!"


내선전화가 울리고 있다. 전화는 내 평화를 너무 자주 깨뜨린다. 출세하고 나면 전화를 개발한 사람부터 부관참시 할 계획이다. 미국에 있으려나. 그러면 비행기표 가격이 너무 비쌀 텐데. 됐다. 전화나 받자.


"따뜻함이 함께하는 동구 강병1동 주민센터 주무관 강동노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기... 안녕하세요. 저는 이계성 님 딸인 김지연입니다. 직전에 통화했던...”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이계성 '님'라고 했다. 통상적으로 부모를 호칭할 때 쓰는 단어는 아니지만 이제는 그까짓 게 무슨 문제인가 싶어서 그냥 대화를 이어간다. 빨리 일을 해치우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다.

"마침 잘됐네요. 전화를 드리려던 참인데. 그때 말씀드렸듯이 이계성 할머니가 쓰러지셨어요. 아시다시피 이럴 때는 보호자의 법적 지위 문제가 있고요."

"아무래도 그렇죠. 근데 그 여자. 우리 가족이라고 보기가 좀 애매해요. 어느날 갑자기 집에서 사라지고. 그러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엄마 행세하다가 그렇게 또 사라졌어요. 그러니까. 그 여자는 저를 두 번이나 버린 거예요."

"선생님. 말씀 중에 죄송한데, 아무리 그래도 지금 이계성 할머니 건강 상태가 보통은 아닌 것 같아서요. 또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계성 할머니가 어떻게 될지 모를 나이시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희도 급하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하아... 그래도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알아서 잘 처리 해주세요. 제가 전화 주신 공무원분한테 어떤 책임도 추궁 안 할 테니 법적 문제도 안 겪으실 거예요. 지금 제 발언 녹음해도 괜찮아요. 아니면 무슨 각서 같은 걸 써야 한다면 보내주세요. 당장 써서 보내드릴게요. 그냥 이계성 님이랑 안 엮이게만 해주세요."

"아... 그러시다면. 제가 나중에 병원비 지원 관련해서 연락을 드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저한테 병원비가 청구되나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통상적으로 가족 사이의 관계가 단절되었다고 확인되어야 의료비 지원 받을 때 가족 소득재산을 조사하지 않게 만들 수 있어서요."

"단절...이요. 네. 이해합니다. 협조할게요."

"관련 건으로 연락드려야 할 때 되면 제가 또 연락드릴게요. 근데 물론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치료가 아닌, 물론 그런 일이 없어야 하고. 또 없을 거지만!"

"돌아가셔도 괜찮아요."

"네? 돌아? 아... 네... 그러시군요. 그렇군요... 일단 알겠습니다. 사안이 작은 건 아니어서, 제가 따로 또 연락드릴 일이 있으면 연락을 드릴게요. 이후 의료적 문제는 병원 측에서 자녀분한테 연락이 갈 수도 있는데, 일단 앞뒤 사정은 저도 병원 쪽에 말을 해둘게요."

"감사합니다. 이계성 님 관련해서는 가급적 연락을 안 주셨으면 해요. 저도 전화 받으면 하루 종일 기분이 안 좋아서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전화는 끊어졌고, 나는 혼자가 되었고, 날은 추웠고, 머리는 아팠고. 천륜은 가벼웠다. 어안이 벙벙하다. 가족이라는 게 저래도 되는 걸까.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직관적으로 미래가 보이고는 한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이계성 할머니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문제 해결의 덤터기를 나 혼자 쓰게 생겼다. 나는 무슨 죄로 이계성 할머니 같은 인간의 일을 책임져야 하는 건가. 참 못할짓이다. 다시 병원에 전화를 걸어본다.


"안녕하세요. 이전에 연락드렸던 이계성 할머니 담당 공무원입니다."

"가족분 연락 되셨어요? 이 할머니 빨리 처리를 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 질환의 심각성도 보통이 아닌데, 이계성 환자분 치매 증상이 폭력적으로 발현 되신 건지. 기존에 정신질환이 있으신 건지. 환자 통제가 아예 안 되네요. 같은 병실 환자나 가족분들이랑 간호사들이 지금 너무 고생이에요. 오늘 아침도 난리였어요. 이계성 환자분은 욕하고 소리 지르고. 다른 환자분들이나 가족분들은 저 여자 어떻게든 좀 해달라고 난리예요."

"그게... 가족을 통한 해결은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계성 할머니 따님은 이계성 할머니랑 자신의 가족관계가 아예 단절됐다고 명시적으로 밝히셔서. 혹시 병원 차원에서 방법이 없을까요? 자녀분 말로는 그 여자, 그러니까 이계성 할머니는 자기 엄마도 아니라고 엄포하셔서 제가 어떤 요구도 할 수가 없는 상태네요."

"하아... 씨발."


뭐라? 지금 욕을? 나한테? 이거 아주 미칠 노릇이다. 하지만 여기서 관계가 틀어지면 나만 힘들어진다. 꾹꾹 참는다. 대화를 하면서 가장 먼저 알아채야 하는 건, 갑이 누구냐의 여부이다. 지금은, 아마 대부분의 경우는 내가 언제나 을이다. 참아야 한다. 을은 화를 낼 자격이 없다.


"어머나. 욕해서 죄송해요. 지금 저희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러시면 저희도 병원 차원에서 나름대로 방식이 있으니까 할머니 신분증이라도 가져다주세요. 본인 확인 절차 진행을 하려면 최소한 신분증 정도는 있어야 해요.”

"알겠습니다. 제가 이계성 할머니 집에 가서 한번 찾아볼게요. 찾으면 바로 연락드리고 찾아뵙겠습니다."


우선 알겠다고 답한다. 생각을 해보니 병원에 이계성 할머니 신분증을 주지 않고 서명만 했다. 이계성 할머니 병원 이송 때 나도 쇼크 상태에 빠져 이계성 할머니의 신분증을 챙기는 것 깜빡한 모양이다. 물론 내가 찾아야 할 이유는 모르겠지만, 타인에게 '씨발' 소리를 들으면 주눅이 든다. 씨발 소리 나왔는데 하라면 해야지 뭐. 그게 신상에 좋다.


"감사합니다. 욕 한 건 다시 한번 더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네요.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아픈 분들 대하는 일만 하다 보니 저도 아프게 된 것 같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이해합니다. 저도 똑같네요."

"이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계성 환자분 가족분들이 인수를 거부하셨다니, 환자분 보호자에는 담당 공무원이라고 기재 해둘게요. 보호자가 기재 되어 있어야만 하는 부분이라. 가족이 인수하겠다고 하면 저한테 연락 주세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원무과 직원은 일단 이계성 할머니 관련 모든 서류에 보호자로 나의 이름을 기재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나와 환자와의 관계는 그냥 공무원으로 적어놓는다고도 한다. 관계가 공무원이라니. 누가 봐도 오답 같은 글자지만. 이계성이라는 존재와 나와의 관계가 또 그러하기도 했다. 이계성은 공적인 업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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