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나보고 예민하다고 하니까 원래 예민한 사람인 줄 알았다. 돌아보면 내가 거쳐가는 곳마다 관계 문제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에는 문제가 생겼을 때 관계를 중단하거나 피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결혼 후 아내와의 관계는 중단할 수 없는 관계였다. 내가 결혼하면 행복하게만 살 줄 알았는데, 부모님처럼 싸우며 살 줄 몰랐다. 우리는 결혼한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소통의 단절을 경험했다. 아내가 내게 어려움을 표현하면 한국 말인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신혼 초 아내가 자주 했던 말이다.
여보. 여보랑 같이 있어도 같이 있는 것 같지가 않아. 여보 집안일 좀 그만해. 왜 무슨 말만 하면 공격으로 받아들여?
나는 퇴근하고 친구들을 만나러 나간 적도 없었다. 항상 가족과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아내는 외로움을 느꼈다. 우리 아버지보다 훨씬 더 집안일을 잘 도와준다고 생각했는데, 아내는 내가 집안일하는 것을 싫어했다. 아내가 속상함을 표현하면 이해되지 않았다. 아내의 말이 공격으로 들렸고 나는 항상 화를 내며 방어하기 바빴다. 아내는 '도무지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아내는 속상함과 답답함에 눈물 흘리는 날이 많았다. 해결되지 않는 부부싸움 끝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나는 정상적인 결혼생활이 불가능한 사람이구나.' 아내에게 "내가 앞으로 잘할게. 여보 정말 미안해."라고 수백 번 말했다. 더 이상 미안하다는 말을 듣기도 지친 아내가 이런 말을 했다. 당시에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나에게 꼭 필요했던 말이다.
여보. 이제 노력 좀 그만해.
'아. 올라오는 감정을 참고 누른다고 해서,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구나. 내가 가진 자원으로 할 수 없는 일이구나?' 신혼생활부터 내 밑바닥이 모두 드러났다. 정말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이제 선택의 문제다. '기회로 삼고 해결할 것인가? 살던 대로 살 것인가?' 지금까지 내면에 고통을 느끼면 도망 다녔었는데 정면 승부가 필요한 순간이 왔다. 상담 치료를 통해 내 문제의 핵심을 찾을 수 있었다. 내 안에 억압되어 해결되지 않았던 감정, '내면아이'를 발견했다. 단순히 예민한 성격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후천적으로 생긴 예민함의 뿌리가 깊게 내려있었다.
내면아이를 치유하면 강렬하고 고통스러운 감정을 다시 겪어야 한다. 불편하니까 그동안 피하려고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내가 결심한 이유는 내면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생겼기 때문이다.내 감정의 고통보다 나 때문에 힘들어하는 아내와 딸을 지켜보는 것이 더 큰 고통이었다. 말을 일찍 배운 첫째 딸이 3살 때 내게 울며 악에 바쳐 소리친 날이 있었다.
아빠 싫어!
딸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매일 싸우는 부모님과 살면서 반드시 행복한 가정을 만들겠다고 다짐해왔는데. 의지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가족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고, 생존을 위해 치유를 결심하게 되었다.
나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치유하며 알게 된다. 나로 산다는 것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인생을 책임지는 일이다.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부모, 억압된감정으로 형성된 나를 그대로 끌어안는 것이다. 억압해왔던 고통을 마주하면 외면하고 싶었던 '슬퍼하는 나'를 찾게 된다. 인정하면 내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서 거부하고 싶다. 그러나 인정하면 눈녹듯 마음이 편해진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뜻은 상대방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상대를 모르고 덮어두고 사랑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나 자신을 그대로 볼 수 있어야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 나를 사랑할수록아내에게 남편의 역할을, 아이에게 아빠의 역할을 조금씩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