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부모와 정서적인 분리가 안 된 걸까? 과거의 감정에 묶여 살면 인생이 참 피곤해진다. 특히 소중한 가족에게 내 부정적 감정의 영향을 전가시킬 때 미안해진다. 결혼하고 살아보니 내가 엄마와 참 많이 닮았다는 걸 알겠다. 지금 내 상처를 해결하려면 이론적으로 '용서'를 해야할 것 같았다. 하지만 도저히 용서는 안 될 것 같아서 먼저 엄마에게 내 속에 있는걸 다 표현해보기도 했다. 갑자기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어보겠다고 비장하게 전화를 걸어 좌절도 해봤다.용서가 도대체 무엇인지, 할 수는 있는건지 다시 고민에 빠졌다.
네이버 표준국어대사전 '용서'
용서의 뜻을 찾아보니 용서 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부모님과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객관적으로 이해해야 했다. 용서하고 덮는 일은 그다음 문제였다. 부모님과 나의 관계를 다시 보게 된 시점은 결혼 후 '부모 신격화'가 깨지고부터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내 감정과 욕구보다 부모를 먼저 돌봐야 사랑받을 수 있었다. 성인이 되어도 부모님의 일을 내 몫처럼 여겼고, 내가힘든 줄 모르고 부모에게 더 잘하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래도 내 몸은 의식하고 있는지 지금도 부모님과 말만 하면 화가 치민다. 내게는 존재 그대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아이 같은 분노가 있었다.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했던 내 마음을 살펴보니 부모만이 줄 수 있는 사랑을 여전히 '기대'하고 있었다. 잘못한 일에 대해 정당한 사과를 받지 않았는데 용서한다는 것은 불가능처럼 느껴졌다. 용서는 엄마가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반응해줄 때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용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용서는 기대를 포기하는 것이다.
용서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내려놓는 것이다. 안 되는 것을 너무 힘줘서 애쓰는 것은 용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힘 빼고 놓아주는 것이다. 과거는 바꿀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과거에 대한 지금의 내 태도다. 지금의 나로 살아가려면 과거를 놓아줘야 한다. 용서는 상대방의 반응과 상관없이 내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분노는 내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저 용서하겠다고 말하고 마음먹으면 그만이다. 엄마를 용서해야 내 자신도 용서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엄마가 나에게 무관심하고 비난했던 것처럼 나도 나 자신을 그렇게 대하고 있었다. 내가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니까 용서할 마음이 내 안에서 나올 수 없었다. 본질적인 문제는 이것이다.
나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
내가 딸에게 화내는 것도 '화내지 말아야지' 하고 드러난 행동을 참아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내가 자신을 먼저 받아들여야 자녀도 사랑할 수 있다. 우리 엄마도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던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나도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딸에게도 '자기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할 뻔했다. 내 언어가 비난이 많았던 이유는 나 자신을 비난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치유의 진정한 시작은 나를 사랑하는 일이다. 용서할 수 있는 힘도 여기에서 나온다. 부모가 나에게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지 못했어도 괜찮다. 힘은 과거에 있지 않고 지금 나에게 있다. 감정은 선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