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엄마가 난소암 2기 판정을 받았을 때다. '암'이라는 소식에 가족들은 깜짝 놀랐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되어 수술이 잘 되면 예후가 좋다는 소견을 들었고, 결과적으로 수술은 잘 됐다. 간호사가 내게 물었다. "입원 치료를 받는 동안 약을 처방해야 하는데 어머니가 먹는 약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내가 알기로 엄마는 불면증 때문에 20대 때부터 약을 평생 드셔 왔다고 알고 있었다. 당시 외할아버지가 매번 엄마 약을 타다 주셨으니 잘 아시겠다 싶어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아버지는 병원에 물어보라며 '정신병원 연락처'를 알려주셨다. 전화해서 약을 알아보니 '불면증'이 아니라 '조울증' 약이었다. 왜 그런 약을 먹는 건지 이해되지 않아서 병명을 물어봤다. 처음 듣는 말이었지만 단 번에 기억에 새겨졌다.
'양극성 정동장애'
엄마는 예민하다는 이유 하나로 잠을 못 주무시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야 엄마의 '장애인 2급' 판정이 이해되었다. 단순히 불면증이 문제가 아니라 조울증이 심한 사람이었다. 엄마에 대해 다시 보게 되었다. 수술이 잘 됐다고 해서 문제없이 지나가는 줄 알았다. 퇴원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발생했다. 엄마가 암 수술을 하면서 불안이 증폭되었던 걸까? 마음속 암 덩어리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빠는 내게 전화를 걸어 다급하게 말했다.
네 엄마가 좀 이상하다. 또 헛소리하고 정신이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아.
엄마는 이전에도 이상한 말을 하면서 아이같이 행동할 때가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2~3학년 즈음 일이다.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아이 입장에서 엄마라는 큰 존재가 정신이 무너진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나 보다. 그때의 증상이 다시 나타난 걸까? 걱정되는 마음으로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드렸다. 할머니는 이미 알고 계셨고 잠시 일주일 정도 집에 데리고 있어 보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엄마는 나이 드신 부모가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다. 무엇이 자꾸 보인다고 하고, 방을 어지르고 아이같이 말하고 행동했다. 이틀을 지내보더니 외할아버지는 더 이상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결단을 내렸다.
잠시 정신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아야겠다.
실제로 엄마의 모습을 보니 아들인 나도 감당할 수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할아버지는 걱정하지 말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도 입원해서 약으로 조절하면 한 달도 안 걸려. 금방 괜찮아질 거야." 할아버지,외할머니, 아빠와 나 이렇게 네 명이 엄마를 데리고 정신병원으로 이동했다. 엄마는 입구에서부터 아이처럼 저항했다. "나를 또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러 온 거야? 난 안가! 싫어 절대로!"가족들은 엄마를 타일렀다. 입원을 하려면 당사자의 동의가 필요했다. 우리 가족은 진료실에 우르르 들어갔다. 담당 의사 선생님은 엄마를 잘 아시는 것처럼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엄마를 능숙하게 달랬다. 엄마는 싫다고 반항하다가 고개 숙여 울기를 반복했다. 나도 엄마에게 입원이 최선이라고 생각해서 같이 설득했다. 엄마가 정신병원에 입원하시도록.
결국 엄마는 입원을 하기로 했다. 엄마를 데려다주는 길 병원의 분위기는 감옥처럼 느껴졌다. 냄새도 불쾌했고 음울한 분위기가 마음을 가라앉게 했다. 엄마는 1인실에 혼자 약 한 달을 있어야 했다. 입원실에 데려다주고 나오는데 엄마 모습이 참 작아보이고 안쓰러웠다. 엄마의 시선은 바닥을 향해 있었다. 나는 위로해주기 위해 기도해주고 나왔다. 병원 밖으로 나오며 엄마에 대한 이미지와 기대가 건물이 무너지듯 부숴졌다. 며칠이 지나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엄마가 언제부터 그랬어요? 할머니가 생각할 때 왜 그런 것 같아요? 몇 번이나 입원을 했었어요?" 할머니에게 들은 답변만으로는 명확한 퍼즐을 맞출 수 없었다. 들었던 답변은 이랬다. "마음이 원래 약했다고. 입원은 열 번 정도 했었다고."
엄마는 과거에 짧으면 2주, 길면 한 달을 수 차례 정신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내 인생만 힘든 줄 알았는데 엄마 인생도 참 고달팠구나.' 엄마는 늘 부정적인 사람, 사람에 대한 불신, 예민한 성격, 신경질적인 말투, 경멸의 눈빛, 사소한 일에 집착하는 등. 이 모든 영향을 받은 나는 인생 살기가 참 불편했다. 그래도 엄마의 사랑이 필요해서 기대하고 또 기대하면서 살았다. '우리 엄마가 그 정도는 아니라고. 그래도 날 사랑하는 게 분명하다고.' 29살, 결혼할 때까지 전혀 몰랐다. 엄마가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살아온 시간이 29년. 이제 '부모 신격화'에 금이가고 무너지고 있다. 엄마는 '내가 원하는 엄마 역할'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부모 신격화'가 벗어지자 사랑받고 싶어 하는 내가 보인다.
이 글의 초고를 쓰고 한 달 넘게 '작가의 서랍'에 보관해두었다. 감추고 싶었나 보다. 그래도 발행을 결정한 이유는 이것이 진짜 내 이야기이고 진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글로 쓰면 내가 붙잡았던 기대를 놓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더 이상 엄마에게 '엄마'의 역할을 요구하지 않기 위해, 엄마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를 나대로 인정해주기 위해 이 글을 발행하기로 했다. 부모에 대한 신격화가 깨지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부모 신격화가 깨지고 충분히 슬퍼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보인다. 우리 엄마는 그럴 일 없다고 진실을 외면해야 살 수 있었던 작은 아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