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사회적 약자이고 나는 외아들이니까 성인이 된 내가 부모를 책임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외할아버지는"네 부모가 연약하니까 네가 이해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대학이나 직업같이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늘 부모를 염두에 두었다. 비행기 한 번 안 타본 부모님이 불쌍히 느껴져 제주도에 보내 드린 적이 있다. 여행비는 학자금 대출을 받아 대학 다닐 때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돈으로 마련했다. 나의 효자 노릇은 죄책감을 덜어 내는 행동이었다.
효자의 정체성은 결혼 후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내는 내가 부모님을 대하는 모습을 보며 불편함을 느꼈다. 부모님은 아들보다 며느리에게 전화를 자주 하고, 며느리로서 시중들기를 요구했다. 아내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부모님 이야기를 꺼내면 나는 변호하기 바빴다. "우리 부모님은 불쌍한 분들이야 여보. 그래도 최선을 다해 나를 키우셨다고!" 아내가 말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인정하기엔 내 존재를 부정하는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부모님과 너무 달랐다. 부모님과 나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진단할 수 있는 제삼자인 아내가 나타난 후, '부모 신격화'가 조금씩 벗겨졌다.
아버지는 나와 통화할 때 본인의 감정만 일방적으로 쏟아놓는다. 전화를 걸어놓고는 "너는 왜 전화를 안 하냐?" 내 언성은 항상 올라갔고 일반적인 대화가 불가능했다. 자식 된 도리를 요구하지만 '나는 사랑받지 못했는데 왜 의무를 다해야 하지?' 라는 반발이 들면서도 죄책감을 느꼈다. 내 아이한테는 참지 않으면서 왜 부모한테는 참는 걸까? 만약 아버지가 내 딸에게 똑같이 한다면 하지 말라고 분명한 선을 그어줄 것이다. 부모 신격화가 일어나는 이유는 아이는 부모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할 수 없어서 잘못을 자신에게 돌리기 때문이다. 부모에 대한 신격화가 벗어질수록 나의 감정과 욕구를 더 선명하게 찾을 수 있다.
부모 신격화가 깨지고 알게 된 것은 나에게 일어난 '진실'이다. 내가 자식 된 도리를 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내가 부모를 책임져야 하는 것'은 내 몫이 아니다. 잘못된 믿음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건강한 균형을 맞출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해봤다.
부모를 어디까지 책임져야 할까?
'마거릿 폴'은 <내면아이의 상처 치유하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모님께 베풀고 있는 것이 두려움, 의무감,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인지,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부모가 요양원보다 자식인 내가 직접 돌봐주길 원한다고 말한다면? 직접 돌볼 수 있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하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부모를 책임지는 수준이 나를 괴롭히고 내 가정을 흔들 정도라면 이미 지나친 일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 부모다. 자식된 도리를 어느 정도까지 해야할지 고민한다면 좋은 기준이다. "죄책감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된다. 내 마음의 그릇이 담아낼 수 있는 크기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정말 부모를 사랑해보고 싶다면 나부터 사랑해줘서 그릇을 키우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