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하는 아들 지후에게, 한창 사춘기인 너에게 처음으로 아빠가 편지를 쓰려고 해.
조금은 특별한 엄마를 사랑하는 이유와 외할머니를 지켜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20여 년 전 그날 하늘도 오늘처럼 비가 많이 내릴 것처럼 하늘이 흐렸지... 그러고 나서 하늘에서는 비가 억수같이 내렸어. 그러나 다음날 아침에는 누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늘이 맑게 개였지.
엄마는 그날 회사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아빠가 외할머니를 모시고 가기로 했어. 그날이 무슨 날 인지는 아빠는 몰랐다. 그곳에 가기 전에 외할머니는 마트에 들러서 요구르트를 4줄이나 샀어. 그 길로 곧장 낙동강 하구언으로 향했어.
차 안 라디오에서는 오드리 헵번의 ‘moon river’ 흘러나오고 공기마저 차분히 가라앉은 모습이었어.
백 미러 본 외할머니는 가슴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뒤로 넘겨 노란색 고무줄로 포니테일처럼 질끈 묶었고 듬성듬성 나 있는 흰머리에 복스러운 코는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거렸지. 창밖을 응시하는 희미한 눈빛에는 웃음기가 가신 두툼한 입술로 무언가를 계속 되뇌고 있었어.
차를 주차한 뒤 10분 동안 갈대숲을 지나 하구언 언저리에 도착했단다. 외할머니는 말없이 아까 마트에서 산 요구르트를 꺼내 바다에 뿌리고 있었어. 이내 슬픈 얼굴로 서럽게 우시면서 ‘내 아들 진아, 여기 일은 걱정 말고 거기 가서는 부디 행복하게 살아’ 하면서 우셨다.
그 순간 차 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moon river’가 오버랩되었어
‘달빛이 흐르는 강.. 그 어떤 것보다 넓은 강
나는 언젠가 저 강을 멋지게 가로지르고 싶어요
언젠가 당신과 함께 멋지게 건너가겠어요
나를 꿈꾸게 하고, 가슴을 아프게 하네요
당신이 어딜 가든 난 당신을 따라갈 거예요
같이 걷고 있는 우리, 세상을 보기 위해 걷는 거예요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세상들이 이렇게나 많은걸요
우린 모두 같은 무지개 끝에 서 있어요
모퉁이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의 어릴 적 친구
달빛이 흐르는 강 그리고 나’
우리 모두는 세상의 무지개 끝에 서 있는 존재인 것처럼...
그래, 그날은 엄마의 남동생이 하늘나라로 간지 1년이 되는 날이었어. 서럽게 우시는 외할머니를 보면서 문득 나도 모르게 일찍 돌아가신 엄마가 떠올랐고 나도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어. 급기야 나중에는 아빠도 목 놓아 엉엉 울고 말았지. 그날 이후로 외할머니와 엄마를 지켜줘야겠다는 결심이 들었어.
지후야, 한겨울에도 눈도 오지 않고 바람만 매섭게 불어 추운 날을 강추위라고 해. 이런 추운 날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그저 옷을 껴 입고 집에 난로를 트는 수 밖에는... 사람 또한 상처가 깊어 눈물도 나지 않고 속만 답답할 때가 있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런 날은 그저 기다리는 것 밖에는 할 도리가 없단다.
아무리 강추위라고 해도 봄에 꽃이 피듯이 혹한의 인생이라도 마음에 빙점은 없단다. 마음이 얼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이 모든 강추위와 혹한을 이겨 낼 수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야. 아빠, 엄마, 할머니들도 그렇고 우리 주위에 다가오는 봄에게는 꽃이 있듯이 이런 강추위와 혹한을 이겨 낼 수 있는 난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빠는 너 또한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 너 또한 아빠에게 꽃이다. 아빠도 이번 생은 처음이어서 항상 너희에게 부족하고 못난 아빠이지만 넌 씩씩하고 강한 아이이니깐 이겨낼 거라고 믿는다 사랑한다 지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