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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꽃지 Sep 15. 2022

열정이 식을 때

나의 박물관


2020년에 개관한 국립익산박물관을 얼마 전에 다녀왔다. 참으로 오랜만의 박물관 관람이었다.

탁 트인 미륵사지 유적과 그와 어울리게 나지막한 박물관은 그 외관만 봐도 이곳이 어떤 유물을 보여주고, 무엇을 위한 전시관인지 알게 했다. 

'기존의 국립박물관과는 달리 유적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전시라~! 음...', 

상설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내 뇌가 자동으로 업무 모드로 전환되어 공간을 읽으려는 찰나,  짜증으로 시작돼서 깊은 회환으로 끝나는 긴 한숨이 마스크를 뚫고 나왔다. 


첫인상만으로도 이곳의 전시설계회사와 쇼케이스 제작 회사가 어딘지 알 수 있었다.

'에휴, 애들 쓰셨구나, 난 전시 관람하는 내 아들들이나 구경해야겠다.' 

바로 가족단위 관람객으로 모드를 바꿨다. 

스토리라인과 상관없이 눈에 띄는 볼거리를 찾아 통과해가는 두 아들을 쫒으며, 가끔 전시에 집중하는 듯 똑똑(?)한 포즈를 취하는 단 몇 초를 놓칠세라 열심히 카메라를 들이대며, 초딩의 관람 속도에 맞춰 박물관을 전속력으로 투어 했다. 

전시 일을 한 이후 그러니까 한 20년 만에 처음으로 뇌를 가동하지 않고 박물관을 걸어 다닌 것이다. 이게 진정 관람객 입장으로 보는 전시구나. 

'잘 만들었네.' 최종 소감 하나.




작년부터 나라장터에 뜨는 박물관 사업공고를 뒤지지 않는다. 틈나는 대로 들어가 보던 트렌드, 전시회 자료 등 인터넷 홈페이지도 안 열어 본 지 꽤 됐다. 요즘 개관한 박물관 정보는 네이버 뉴스에서 어쩌다 눈에 들어오는 수준...  내 직업과 관련 없는 삶을 살고 있으니 무직과 진배없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심장이 뛰기 시작할 정도로 그렇게 좋아했었는데, 영혼을 즙을 내 짜고 짜서 겨우 마감을 치고 나서도 새로운 프로젝트를 받으면 또 콩닥콩닥 신나게 집중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주장하는 방향을 굽히지 않고 끌고 가며 [전시란, 박물관이란,]이라는 혼자만의 정의를 내리고 또 고치고 했었는데', 

사랑이 식듯 그냥 식었다.


솔직히 <전시 일>에 상처를 받기 시작한 건 꽤 오래전이다. 그래도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회사를 굴려야 했기 때문에 꾸역꾸역 끌고 오던 거였다. 직원들이 모두 퇴사하고 사무실을 빼고 나니 어찌나 홀가분하던지...

그 상태로 다 잊고 지내다 보니 잘 만들어 놓은 박물관조차 날 흥분시키지 않는 날이 온 거다. 이렇게 열정이 흔적도 없이 식어버릴 수 있나.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전시업계는 너무나 사업구조가 열악하다. 대부분이 공공사업이며 사업비가 높은 것에 비해 수주방식이 공정하기가 어렵다. 시장의 파이가 워낙 작아서 회사들의 규모가 커지기 힘든 구조에서 몇몇의 소규모 전시 회사들이 입찰에 목매며 과도한 경쟁에 피 흘리는 싸움을 한다.

[전시기획, 전시디자인] 일 자체는  매력적이라 그 재미에 빠져 들었다가, 국내 입찰방식의 한계를 느끼는 순간 능력이 있는 자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그런 분야이다. 20년 넘게 한 일을 하면서도 후배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나 조차도 일이 너무 좋았지만 이 일이 비전 있다고 직원들에게 전하기 힘들었다. 내가 사는 꼴을 보고 미래가 없음을 느끼고 나간 직원도 있다.

솔직히 이만큼 버틴 것도 용하다. 아마 남편과 내가 회사에서 만나서 둘이 같이 사업을 하며 의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지 나도 혼자였다면 애당초 때려치우고 어디 문화정책 연구소에 들어가 보고서를 쓰고 있었을 거다. 아님 아무것도 안 했을지도....


나에게 열정이 뭘까?

너바나, 커트 코베인이 "열정 없이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Rather be dead than cool)"라고 했었다.

나 또한 그 심정으로 뭔가에 빠질만한 걸 정해서 늘 하나에 미쳐야 사는 사람처럼 굴었다. 친구에, 연애에, 일에, 술에, 운동에,,,, 끝장을 보게 달려들 때 아드레날린이 확~~ 도는 느낌이 사는 맛이라 했었다.

그러다 기력이 빠지고 해야 될 의무는 늘어만가는 나이가 되니 자꾸 내 삶의 방식에 물음표가 생기는 거다.


'열정을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네이버에 쳐본다.  

즉시 상단에 뜨는 창에서 열정 유지를 위해서는 3가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렇게 숫자로 개수를 정해주는 방식의 글에 먼저 마우스가 클릭하는 법!)

첫째, 나만의 에너지 동력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독서이든, 휴식이든, 운동이든, 사람이든지

둘째, 나의 에너지를 빼앗아 가는, 즉 힘 빠지게 하는 동료나, 상사, 가족, 친구들의 언어에서 벗어나야 한다.

셋째, 나의 일에 대한 의미와 가치가 확고해야 한다.


피식 웃음만 나왔다. 나에게 전시는 두 아들의 육아 전쟁터에서 가장 큰 장애물이라 에너지 동력 따위는 찾을 수 없었고, 전시업계 자체가 이 일을 계속할 이유가 없음을 명백히 했으며, 아무도 나의 일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제안서 잘 쓰는 일꾼일 뿐이었다. 결국은 돈의 논리나 정책의 일환으로 결정되는 건립방향이 내 고민과는 늘 상관없었기 때문에,,, 

이런 걸 이미 십여 년 전에 인식했음에도 아직까지 끌고 온 이유가 뭘까? 

'돈을 버는 수단이었음' 외에, 그래도 내가 열심을 다했던 이유가 뭘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기저는 '불안'이 있었던 거 같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 남보다 잘한다는 자부심,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게 인생의 성공이라는 허상, 손을 놓으면 나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거 같은 불안감,,,,

그 불안함에 나의 열정이 박물관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

20년 동안이나....


이제는 털어 버릴 때가 된 거다.

'열정이 식을 때'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나의 새로운 원동력이 되기를 바라며 일단 내려놓으려고 한다. 잘 접어 두면 여기서 또 다른 모양의 작품으로 연결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한 우물을 파면 성공한다고, 나도 한 가지 일을 20년 하면서 배운 거는 확실히 있다. 우선 내 뇌가 구조화된 사고에 길들여졌고, 제안서, 즉 설득력 있는 글을 쓰는 방식을 터득했으며, 그 누구보다도 많은 자료에서 핵심 내용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 졌다.


이거면 됐다.


일단은 잘 접어 두려고 한다. 


그리고 다시 또 열정이 피어나길 바란다. 전시이든 아니든,,

그리고 다시 떠오른 열정에는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다가가고 싶다.


나의 박물관, (주)JNP플래닝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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