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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꽃지 Sep 15. 2022

집이라는 요새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


자고로 대전은 땅을 넓게 넓게 썼었나 보다.

큰大 밭田

나에게 대전은 그냥 '큰 집'이다.


남편은 마당 있는 주택에 살고자 했던 꿈을 이뤘고

'아,,, 집 크다' 하는 사이에 남편은 집사로, 나는 가정부로 그 집에 채용됐다.


그 집에는 모셔야 할 초딩 사내아이 두 명이 있다.

할 말은 대하소설이지만, 입을 닫겠다.

남들은 마당에서 개 한 마리 키우면 참 좋겠다 하지만, 이미 집 안에 두 마리가 살고 있어서 난 족하다.


집 안과 집 밖 모두 풀이 무성해,

남편이 사랑하는 풀들을 이제는 나도 가족으로 품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이 태풍처럼 몰아친다.

햇살 좋은 날의 일과였다.

쏴~~ 하는 소리와 함께 마당에 호스로 물을 주는 건  즐겁고 삶의 여유까지 느끼게 했지. 내가 마치 일일드라마 주인공이 되어 '네~ 성북동입니다~'하며 전화를 받는 [아줌마~~]와 같이 사는 고상한 사모님이 된 듯한 기분이랄까.

물론 상상이다.

실상은 허리 펴고 있기 힘들다.

육아를 늘 베이비시터와 함께 했던 입장에서 큰 집에서의 두 아들과의 삶은 일단 낯설고, 부스럭 부스럭 청소를 하고 다니지만 그 많은 할 일속에서도 내 주변은 조용하다. ASMR 층간소음도 없다. 난 집에 있는다. 딱히 갈 데가 없기도 하지만 눈 뜨면 집이고, 눈 감고 자는 곳도 집이고 그냥 있는 거다.




집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나?

재산으로서의 집 말고 '실존'으로서의 집 말이다.

주거, 거처, 기거, 거주, 가옥, 처소, 대충 비슷한 단어만 봐도 집은 '살이+공간'이라는 뜻이다. 사는 공간이 집이라는 걸 모르는 자는 없을 것이나 '우리가 왜 집을 건축하고, 집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어떤 경계를 만드는가'에 대해 불현듯 공포를 느꼈다. '내가 집에 갇혀있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늘 흥밋거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나의 촉수를 건드린 거다.


하이데거는 1951년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 Bauen Wohnen Denken」(영어로, Building Dwelling Thinking)이라는 글을 냈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사유를 건축에까지 뻗으며 “건축 작품이란 근원적인 세계인 사역을 드러내고 그것을 자신 안에 수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잉?

뭔 말인가!

건축학과 첫 설계수업에서 교수님이 '너희의 본연적 무식함'을 일깨우기 위해 학생들에게 던지는 어려운 질문들 중, 꼭 이 분 하이데거의 말이 서두에 나선다.

대충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에 대한 설명을 문자의 나열로 베껴오면 이렇다.

"건축함은 본래 거주함이고, 거주함은 본질적으로 사물 속으로 사방을 모아들임으로써 개방되는 공간을 소중히 보살피는 짓기인 것이다. 우리는 건축을 해왔기 때문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거주하는 한에서만, 즉 거주하는 자로서 존재하는 한에서만 건축을 하며 또한 거주를 해왔던 것이다. 우리가 우리답게 존재할 수 있도록 거주하는 것은, 거주함으로 삶의 모습을 회복하고, 실존하기 위함이다. 거주함은 단순히 인간이 한 공간 속에 있음(머무름)이 아닌 인간 본연의 존재가 세계(자연)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을 때 진실할 수 있다는 뜻으로서, 그 관계를 파수해 낼 때 만이 우리가 지속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우리는 거주하는 한에서 건축을 한다. 즉 건축함은 곧 거주함이고, 거주함은 인간의 존재함의 양식이다."


아~휴~ 철학은 한 다섯 번은 읽어야 뭔 말인지 들어오고, 이해가 돼도 짜증이 난다. 왜 이렇게 어렵게 써놨을까 하면서도, 현학적 단어들로도 다 담을 수 없는 내 뇌의 시끄러운 잡념들이 더 난해해서 어찌 됐건 친절하게 글로 풀어써주신 철학자들의 위대함에 구시렁대는 잡소리는 들어간다.

아, 그렇다고 내가 철학적 인간이라는 것은 아니다. 대학 때 호기 넘치게 도서관에서 빌린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단 몇 장 읽다가 질려버려 덜렁덜렁 들고 술 마시러 갔다가 대출한 그날, 책을 홀라당 잃어버린 경험도 있는 사람이 나다.


어쨌든 하이데거의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시작은  '권태'같은 '지루함'에 대한 사유에서 비롯됐고, 그는 무엇보다 '인간 실존의 존엄함과 자유'를 확보하고자 투쟁해 왔다. 하이데거 사상 중 중요한 용어인 '현존재' '세계-내-존재' '고유성'도 불안과 권태라는 것을 거쳐, 대상을 있는 그대로 사유하는 것, 대상을 있는 그대로 존립하고자 하는 정의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해 고민하며 인간의 사고와 장소, 즉 공간을 결부한 것이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이다.


풀이하자면, 인간이 지루함을 벗어나 다시 한번 자신의 본질을 요구할 수 있는 '사방이 막힌'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거주하기'이며, 사람이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방식인 '거주하기'를 위해 사물들을 '건축'함으로써 그것의 본질 속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 이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자! 그만 나불거리고 지금 나에게 이 어려운 철학이 왜 중요하냐고???

집에 너무 오래 있기 때문이다. 지금껏 물리적 장소로써 멀리서 바라보거나 나를 쉬게 하는 네모난 형상을 갖춘 공간으로 여겼던 '유형의 집'이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하나의 정형화된 세계가 되어 나에게 '무형의 압박'을 가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넓은 대신 용도별 공간이 구별이 확실하여 육아를 하면서 밥을 올리고, 그 사이 내 작업을 하는 등의 멀티로 살 수 없는 구조다. 한 번에 하나씩만 해야 한다. 넓은 마당은 무지막지한 일감을 제공하며 개를 키우자는 끊임없는 요구를 한다. 집에 외딴곳에 있지는 않지만 집 안에 있으면 외부세계와 완벽히 차단된다.


가장 결정적인 건 나를 집 밖으로 나가게 하는 어떠한 강제성도 없다는 것! 하루 종일 나태할 수도 하루 종일 부지런할 수도 있는, 집이 '내 모든 모습'을 가려주는 성(城)이 돼버린 것이다.

그 안은 온전한 세계라서 밖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요새가 된다.  

완벽한 보호는 완벽한 안일을 자아낸다. 요새 안에서 가만히 있는 건 쉽다. 하지만 에너지를 분출하긴 어렵다.

무언가 하고 싶지만 뭘 할지 몰라서 거실을 뱅글뱅글 돌아다닌다. 너무 조용하면 넷플릭스를 주구장창 틀어 놓고 지칠 때쯤 아들들이 일거리를 몰고 온다. 뒤치다꺼리를 하다 보면 하루가 끝난다.


이 멍한 나에게 하이데거는 나 자신만의 고유성을 회복하여 삶의 실존을 찾으라고 말해주는 거다. '거주지에서 존재에 대한 사유를 할 수 있을 때 이곳이 마음의 고향이 될 수 있을 것이니.'라고 하면서 말이다.


지금껏 미뤄두었던 '존재에 대한 사유'라는 것을 한 번 해봐야겠다.

혹시 아나, 여기서 나도 몰랐던 또 다른 내 모습을 발굴한다면 여기가 내 마음의 고향이 되어 줄지...






 大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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