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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꽃지 Sep 15. 2022

사랑해서 헤어진다.

일과 술

대전 갑천


45살 나이에 삶의 터전이 바뀌었다.

 

내 계획 안에 없던 일이었고 나의 결정이 아니었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한 선택들과 주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자연스레 흘러가게 되는 그런 일...

그렇지만 이번 흐름은 왠지 인생의 변곡점이 될 거 같아 남편이 대전 소재 대학에 임용되자마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일단 남편에게 기러기 생활을 시키며 1년의 유예기간을 벌어 놓고 생각했다. 


'서울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서울에 나의 것으로 남아있는 게 무엇인가? 

꼭 서울이어야 한다면 그 이유는 뭘까?' 


태어나서 줄곧 살아온 곳이지만, 부모님을 비롯해 중요한 나의 사람 몇몇은 이미 서울에 없다. 더구나 난 이곳에서 12년간 운영하던 사업체를 정리했고, 하던 일도 벌이도 잃었다. 살던 곳이니 사는 거라며 버티기엔 서울에 내 집 한 칸도 없다. 아이들을 앞세워 자녀교육을 위해 남겠다 우길 수는 있겠지만 그 뒷일을 내가 혼자 감당하기에 수월치 않은 빡쎈 아들들이었다.

남아있을 이유를 대기 힘들었다.


'그래, 내려가자.'


외형은 교수가 된 남편을 따라 지방에 내려와 여유로운 삶을 살게 된 운 좋고 때깔 나는 모습이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남편과 함께 온 힘을 다해 꾸려왔던 사업은 결국 폐업 직전에 두 손 두 발 다 든 것이었으며, 그간 바쁘게 살았던 탓에 아이들 양육 문제는 불거지고 있었다. 체력이 바닥임에도 몸무게는 최고점을 찍고,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는 흰머리와 주름은 나를 세월 앞에 무릎 꿇게 했다. 때마침 전 세계인을 불안하게 한 코로나까지 겹치며, 내 인생의 후반부가 속수무책으로 암흑 속에 빠져들 것만 같은 시점이었다.

그때 남편이 임용된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 맞다. 적지 않은 나이에 교수가 된 것이기에 주위에서는 하나 같이 놀라워했고 복이 많다 말했다. 물론 나 또한, 인생 고꾸라지기 직전에 내려온 황금 동아줄에 진심으로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마냥 감사하고 기뻐하기엔, 나 자신이 너무나 공허했다.


물항아리에 물을 채우겠다는 일념 하나로 죽을 둥 살 둥 이고 지고 길어 나르다가 

어디서 날아온 돌멩이 한 방에 "쨍그랑~", 등 뒤에 물을 다 쏟아 버려 멍한 나에게 

'이제는 좀 가벼운 거 들고 가서 다시 받아와'라며 빠게스를 건네받은 기분이랄까???

물을 아무리 받고 받아도 계속 비어지는, 그냥 나 자신이 '빈 통' 같았다.


그렇게 공허하게 '빈 빠게스'를 손에 쥐고,,,


올해 1월, 결국 나는 대전으로 내려왔다.







인생은 밸런스 게임이라고, 


행과 불행은 함께 온다.

살면서 일어났던 나쁜 일들은 가만히 뒤돌아보면, 늘 좋은 일과 같이 왔다. 

또, 행운으로 여겼던 일 가운데서도 늘 힘들고 나쁜 점은 동반됐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너무 기쁘면 그 감정에 반하는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울다가도 넋 나간 듯 웃기도 하고,

대책 없이 화가 날 땐 오히려 헛웃음이 난다.


사는 모습도 그렇다.

잘 노는 학생이 공부도 잘하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열정적으로 일에 몰입한다.

주어진 의무에 충실하기 위해선 적당한 삶의 일탈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균형, 평형, 평상심, 항상성을 유지하는 게 삶이고 모든 생명이 그렇게 시소 타기를 하며 살아간다.  









45년을 살아온 그 결과물로써 내 삶을 규정하자면, '일과 술의 밸런스' 이다.


일은 내가 꿈꾸고 키워온 나의 목표이자 열정이었고, 술은 스트레스를 풀고 사람을 사귀고 즐거움을 주는 생활의 도구 같은 습관이었다. 일이 나에게 성취감을 주며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앞바퀴라면, 술은 잘한다 잘한다 밀어주는 뒷바퀴였다.


그런데 지금은 앞뒤고 자시고 없이, 그저 다 비었다. 그리고 여긴 딴 세상, 대전이다.


맨날 챙겨야 하는 두 아들만으로도 바쁘게 굴려가는 큰 집안에서 하루를 보낸다.

그저 멍하다. '뭐 하지?' 하면 둘째 학원 보내는 시간이고 컴퓨터 켜볼라는 참에 첫째가 오고, 왔다 갔다 치우다가 저녁밥을 차리고, 전쟁 같은 숙제 타임 뒤에 씻고 재우고 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맥주 생각뿐,

어제도 마시고, 오늘도 마시고, 내일 먹을 맥주를 사고,,, 이제는 술이 도구가 될 필요조차 없는, 그저 습관으로만 남아있는 상태랄까. 하루를 굴리기 위해 습관적으로 맥주 캔을 딴다.


'아... 나 진짜 어떡하지.'


그래 이젠 다른 앞바퀴와 뒷바퀴를 구해야 한다. 삐꺽 대는 일상에 뭐든지 구해서 끼워야 한다.

붙잡고 싶지만 더 이상 '일과 술'이  내 삶에 밸런스를 맞춰주지 못함을 인정해야 한다.


깨져버린 균형 때문에 모든 게 흘러내려 이렇게 공허한 빈통이 되었구나.


미련에 부들부들 떨리는 마음으로 헤어짐을 고한다.

일과 술, 정말 사랑했어.

사랑해서 헤어진다.


사춘기가 그랬듯, 

불현듯이 다가와 변화를 종용하는,

그렇다. 나는 지금 생애전환기이다.



2022년 9월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여정, '생애전환기'를 브런치에 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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