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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꽃지 Sep 18. 2022

호모 헌드레드

두 번째 사춘기


"언니! 나 내일 아침에 대전으로 간다~"


친구가 서울에서 번개처럼 날아왔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이게 얼마 만에 느끼는 설렘인가! 신나서 대전역으로 마중 나가 그녀를 태우고 대전에서 가장 복작복작한 동네인 둔산동에 있는 브런치 카페로 향했다. 하루 첫끼를 맥주와 함께 넘기며 SRT가 일일생활권으로 이어준 4시간이라는 이 짧은 만남을 폭풍 수다로 채우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했다.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며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내 삶이 마무리될 줄 알았어. 근데 40대가 되고 나니 애들이 다 큰 다음에 노년의 삶이 너무 길거 같아서 걱정이야.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이 보내야 하는 시간이 너무 길거 같아. 100세 시대에는, 지금쯤 새로운 걸 다시 시작해야 하나 봐.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20대의 진로 고민이 40대에 또 필요해진 거지. 근데 고민만 돼. 뭘 할지 모르겠어." 

맞다. 딱 이거다. '지금 이 땅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중년들이 맞닥뜨린 정체불명의 불안함'


호모 헌드레드는 사춘기를 두 번 겪는다.

첫 번째는 2차 성징과 함께 시작되고, 두 번째 사춘기는 흰머리와 주름, 근육 손실, 관절 삐그덕, 안구건조, 불면, 오십견.....ㅜㅜ 몸이 말을 안 듣기 시작하는 노화의 출발선에서 기습적으로 훅~ 날아온다.   





다들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주변에 100세가 되신 어르신을 거의 뵌 적이 없어서 아직까진 실감이 나지 않는 거 같다. 나조차도 지인의 조부모가 100세가 넘으셨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통계청의 연도별 인구주택 총조사를 보면, 2020년 100세 이상의 초고령 인구는 5천581명(여성 4천731면, 남성 850명)으로 1990년의 459명 보다 10배 이상 증가했다. UN이 2009년 작성한 '세계 인구 고령화' 보고서에서는 전 세계의 100세 이상 인구가 2025년에 320만 명으로 약 10배가량 증가할 것이라 한다. 그야말로 100세 장수가 보편화된 시대의 인간을 지칭하는 호모 헌드레드(Homo-hundred)가 코 앞에 온 거다.


나이에 대한 기존의 사회적 규정이 무너지고 있다. 2015년 UN이 발표한 새로운 인간의 생애주기에 따르면 인간의 중년은 65세에 이르러야만 가능하단다. 호모 헌드레드로 지칭되는 이 인류는 지금까지의 생애주기 막대를 엿가락처럼 쭈욱 늘려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년기만 질기게 늘어나는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다 같이 길어져야 이 사회가 조화롭게 굴러간다는 것은 자명하다. 즉, 45세쯤은 아직 청년이라는 말! 우린 늙게 살면 안 된다. 아직 어린 두 아들들만 봐도, 우리 부부는 70대까지 수입이 있어야 하고, 이건 우리 집안 만의 일이 아니다. 애처롭지만 '60대 은퇴와 황혼의 여유'는 역사에 새겨져 잉크까지 마른 옛날이야기가 됐다. 이게 현실이다.


이 시대의 40대여! 정신을 차리자! 그리고 단디 준비하자!

우리는 12만 년 현생인류의 역사상 최초로 '70대까지 생산활동을 활발하게 해야 하는,'

피곤할 정도로 긴 명줄을 가진 세대인 것이다.

고로 40대는 매우 젊은이다. 나는 젊다.


눈물 나지만, 이 현실을 좀 더 희망적으로 받아들여 보면 어떨까.

'청춘을 청춘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란 말이 있지.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란 노래도 있지.

'아파야 청춘'이라고 어느 시대에나 청춘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신체적으로 가장 건강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불안정한 나이이기에 커다란 열정을 감당하고 성취로 이어가기엔 너무나 미숙해, 우왕좌왕하다 보면 아무리 움켜쥐어도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는 물살처럼 그렇게 흘러가 버린다.

하지만, 40대는 다르다. 40대란 나이는 생에 대한 관록과 삶의 노하우가 바탕이 되어 정서적으로 안정되는 시기임에는 틀림없다. 40대는 적어도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나와 잘 맞는지, 내 취향이 어떤지는 확실히 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실직을 하거나, 사업이 망하거나 하는 삶이 휘청이는 일격을 겪어내며, 그래도 세상이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거쯤은 채득 해서 알고 있다.  


고로 우리 40대는, 중년의 깊이에 청춘의 젊음을 겸비할 수 있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새로운 마인드를 장착할 수 있다는 거다. 그래, 말이 쉽다. 듣도 보도 못한 마인드인지라, '똘아이처럼 앞뒤 없이 도전해봐라?' 이런 건가? '내가 너무 꼰대처럼 안주하는 건가?' 싶기도 하며 골만 아프다. 바로 여기가 찐중년이 성장통을 앓게 하는 지점이다.  '내가 지금 무엇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이도 저도 못하고 마음이 허해진다.


그런데 이런 주저함은 '도전'이라는 말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기 때문 아닐까? 보물섬 지도가 상상 속 이야기인거 처럼 '인생의 청사진'이 그려진 밑그림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알지 않는가? 도전을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성공을 향한 앞만 보는 돌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공이라는 것은 마치 신기루 같아서 잡으려고 하면 저만치 도망가고, 잡았다 해도 휙~하고 순식간에 증발해 버릴 수 있다는 걸. 성공 그 자체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이제는 내 인생의 행복을 여는 길을 찾는 것이 도전이며 그 결과로써의 행복이 곧 성공이다. 물질적 가치, 혹은 세속적인 평가와는 별개의 꿈을 꾸어야 한다.


쉽게 말하면, 20대는 인생역전ㆍ입신양명의 '성공의 한 방'을 위해 길을 찾아 헤매지만, 40대에는 안다. 사람은 한 방으로 성공할 수 없고 '나를 무너뜨리는 한 방'만 피하면 된다는 것을. 그래서 40대의 눈에는 20대 보다 더 많은 길이 보일 수 있고 따라서 선택의 폭도 넓다. 일단 폭망 하는 길만 피하면 되기 때문이다.


새로 시작하기에 앞서 너무 자신이 없다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그래서 지금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부터 명확히 하자!

흔히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한다.  일단 거울을 들여다보며 내가 지금까지 나를 어떻게 만들어 놨는지, 최대한 객관적(?)으로 점수를 매겨보자. 물론 피부과 견적은 어마 무시할 거다. 껍데기 말고 내면을 보자. 만약 지난 생의 불만족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 차 내 얼굴에 그늘이 있다면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어제의 나와 쿨~~ 하게 결별하는 거다. 그리고 내 얼굴이 웃는 지점, 내 눈이 반짝이는 순간, 내 입에서 나오는 따뜻한 말들을 하나씩 기록하자. 소소한 행복과 즐거움에 나의 길이 있을 것이니.


샤르트르가 그랬다.


인간은 먼저 세상에 존재한 다음

주체적인 선택을 통해 자신을 형성하는 존재,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자유를 펼칠 수 있다.


인간 실존의 핵심은 바로 자유!


인간은 외적으로 규정되거나 결정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주체적 존재.


인생은 B와 D사이의 C이다.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에 있는 C(Choice)이다.      -Jean Paul Sartre(1905~1980)



B(Birth)와 D(Death) 사이에 있는 C(Choice)가 인생이다.

자! 선택을 하자! 선택을 해야 나의 길이 정해진다.

그리고 샤르트르의 말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A(Action)' 

C→A

과감하게 C '초이스' 그다음은 주저 말고 A '액션'이다.

시간은 많다. 재수 없으면 우리에게 60년 이상의 시간이 남아있을 수도 있다. 중년의 청춘들아! 한숨은 거두고, 이 길이 아니면 다시 돌아올 시간도  충분하다는 걸 무기 삼자.  아직 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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