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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꽃지 Sep 28. 2022

진짜 자존감

끊어버리는 용기


https://www.youtube.com/watch?v=DkwN8ZOF4Xk

가끔 보는 유튜브 대기자 TV에 조선미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나와서 한 말이다.


"자존감이 낮다고 얘기하는 성인들이 많은 것 같아요. 중학교 때부터요. 저는 자존감이라는 것이 눈으로 관찰되는 시기가 그때쯤부터 인 거 같아요. 원래 자존감이라는 개념은 성인이 된 다음에 우리 마음에 구성 개념이 유동적으로 형성된다고 하거든요. 그전에는 변동 가능한 개념이에요. 아이가 어리면 엄마들이 내향성과 외향성을 자존감이라고 잘못 생각해요. -중략-  그런데 자존감을 높인다고 해서 굉장히 붐업하시는 분이 있어요. 부모가 아이의 자존감을 너무 강조하면 아이는 이렇게 돼요. 종이를 들면 '우리 딸~ 종이 들었네' 이렇게요. 이건 과하죠. 그럼 얘네들은 보육 기관에 못 갑니다. 자존감을 빵 튀겨 놓은 거예요. 그러면 얘는 모든 사람이 나한테 박수갈채를 보내야 돼요.  이건 병적인 자아입니다. 아이를 너무 높이면 실패와 좌절에 취약해져요. 자존감을 높여야 한다는 말은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대한민국 마음 보고서」 심리학자 하지현의 저서에 이런 글이 있다.

"지금의 10대는 부모의 과도한 칭찬을 받으면서도 적당한 좌절을 경험하지 못하며 자란 탓에 극대화된 유아적 자존감이 그대로 남아 있다. 결국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자기중심적이며 부를 숭상하고 자의식이 지나치게 강하다. 타인의 적절한 비판을 부적절한 비난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강한 분노로 반응한다. 이런 유의 반응만 하면서 자기만의 환상 속에서 자족한다. 그런데도 역설적으로 내면은 불행하다. 현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고 자신이 실제 승리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정도의 현실 인식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나도 부모 된 입장에서 우리 아이가 건강한 자존감과 회복탄력성으로 사람으로 자라길 가장 바란다. 행여나 내가 무심코 하는 행동이 아이의 자존감에 스크레치를 낼까 봐 화를 누르고 누르며, 좋은 엄마의 탈을 쓴다'어금니 꽉 깨물고 하는 상냥한 연기가 진짜 아들들한테도 따뜻하게 들릴까.'라는 의구심에 혼란스럽다.




나를 돌아본다.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알아서 인생의 역경에 맞서는 능력을 '자존감'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나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다. 하지만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깡과 독기로 무장한 양 굴면서 속으로는 늘 불안 불안한 열등감을 품고 있었다. 지지 않으려고 매달렸고, 그래서 지지 않을 사람만 고르고, 질 수 없는 판에서만 놀았다. 그 알량한 자존감이 시궁창에 콱! 처박히기 전까지 말이다.


나는 자식을 갖기까지 정말 긴 시간이 필요했다. 힘들게 가진 아들이 태어나는 그날, 아주 우량한 아기가 내 품에 안길 때,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종류 감정이 뭉탱이로 엮여 기쁨, 설움, 환희, 감격, 감사, 울분이 한꺼번에 팡팡 터지며, 내 몸의 모든 세포가 일시에 펑펑 우는 듯한 신기한 경험을 했었다. "산모님, 지금 웃으시는 게 아니고 우시는 거죠?" "몰라요. 웃는데 자꾸 눈물이 쏟아져요."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가야, 이렇게 온 것만으로 넌 다 한 거다. 나에게 모든 걸 줬다.' 


감정이 과했던 걸까,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이걸로 다됐다는 안도감이 너무 설레발이었던 걸까.

그렇게 귀하게 태어난 아들이 상상치도 못했던 아우라를 뿜어대며 내 인생을 쥐고 흔드는데, 그때부터 내가 뭘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버라이어티 하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자식을 기다리며 '난 저렇게 양육 안 해, 어떻게 아이를 저렇게 키우지? 부모는 뭐 하는 거야?'라며 속으로 욕했던 어린애들의 모든 호작질과 저지래를 우습게 만드는 '탑 오브 탑'이 바로 내 아들이 될 줄이야. 길바닥에 드러눕고, 다른 아이들을 할퀴며, 어디서든 울음과 괴성으로 주변을 제압하는 아들 때문에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숨 쉬듯이 하고 다녔다. 경험해 본 사람만 안다. 자식이 '아웃 오브 컨트롤'이 되면 부모가 얼마나 무기력해지는지. 내적 외적으로 그냥 쭈그리가 된다.


세 돌이 채 안됐을 때였다. 그날도 아이와의 외출 후 콱! 쪼그라들어서 육퇴 후에 혼자 맥주를 깠다. 

'아! 내가 내 사랑하는 아들로 인해 자신감을 잃으면 안 되지.' 한 모금,,, '세상 누구보다도 내가 내 아들을 자랑스러워해야 하는데.' 한 모금,,, '내가 진짜 모자란 엄마인가.' 한 모금,,, '이렇게 계속 아들이 내 발목을 잡으면 어쩌지' 한 모금,,, 음....... 내 발목? 내 발목? 발목? 쭈르륵 ㅜㅜ



 





Ball and Chain



그래, 난 늘 쇠뭉치 같은 열등감의 족쇄를 차고 살고 있었어. 다들 가볍게 걸어갈 때 발에 달린 쇠뭉치를 탓하며 늘 '힘들어, 힘들어' 하며 주저주저했던 거, 나는 안다. 내가 얼마나 열등감을 숨기며 쎈 척하고 살아왔는지. 나이를 먹으면서 쇠뭉치의 종류만 바뀔 뿐, 하나를 풀면 곧바로 다른 걸 찾아서 채우며 난 스스로 나를 옭아맸었다. 지금은 '아들'이지만, 얼마 전까지는 아무리 해도 들리지 않는 '영어'였고, 어렸을 때는 '남들보다 몇 배는 노력해야 잘할 수 있게 되는 나의 느림'이 내 자존감을 갉아먹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아무 노력 없이 한 번에 잘하는 게 없는 내가 너무너무 싫었었다. 공기놀이의 뒤집기 같은 시시한 것도 한 번에 안돼서 혼자 방에서 손등이 빨갛게 될 때까지 뒤집고 뒤집어 봐야 그나마 놀이에 낄만한 정도가 되는 게 나였다. 뭐든 늘 빨리 습득하는 오빠한테 눌려서 '나는 바보인가'라는 대명제를 깨고 깨고 깨고 나오는 게 나의 삶이었달까. 그나마 지독한 악바리 근성 하나로 남들이 잘 산다고 하는 정도의 높이까지 겨우 올라왔는데, 지금 내가 분신같이 귀한 아들을 내 발목에 채워서 새로운 족쇄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퍽! 들었다. 


이건 아니지. 나 자신을 탓하며 살다가 이제는 아들 탓을 하려는 거냐. 

<난 왜 이 정도야> 타령, 이젠 그만하자.

내가 어찌 피할 수 없는 상황이나 처지, 노력해도 쉽지 않은 능력의 한계, 짊어지고 가야 하는 의무 등,,, 

나의 노력으로 해결이 안 되는 종류의 것들은 '나'라는 실체 밖으로 내려놔야 한다. 그건 내가 처한 환경이고 내가 가진 조건이지, 내가 아닌 거다. 그런 환경에서 그 정도의 능력으로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내가 대단한 거지. '네가 내 입장이 돼봤냐? 나니까 이 정도 하는 거다. 너나 잘해라.'

<못하는 나>가 아닌 <애쓰는 나>를 나의 실체라고 생각하니 그 노력으로 인해 이룬 성과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 능력을 나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 노력이 나라고 생각하니 대견하기까지 했다. '그래, 내가 이렇게 많이 이루면서 살아온 거지. 힘차게 살다 보면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것도 다 해결하고 이루어낼 거야. 늘 그래 왔잖아.'


그때부터였던 거 같다. 프로젝트의 결과나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귓등으로 스쳐갈 뿐 더 이상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고, 화장실에서 직원들이 하는 내 뒷담화에 칼 꽂은 농담으로 응수하며,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게 된 게 말이다. 정신과의사, 심리상담사, 종교인들이 귀에 딱지 앉게 하는 말. '인생철학을 갖고, 거절당하고 실망한 뒤에도 툭툭 털어버리는 법을 배우고, 얼른 포기해야 할 하위 목표와 좀 더 고집해야 할 상위 목표의 차이를 두고 장기간의 열정과 끈기를 유지하라고.' 이 말의 진짜 의미를 깨닫고 그와 비슷하게 살게 됐다.


예전의 나처럼 마음이 약하고 귀가 얇고 자신감이 없는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내 족쇄를 끊어버리는 용기를 가져보라고. 

못할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다. 그것이 안 하고, 다 잃어버리고, 도망가는 것보다 훨씬 낫다. 노력하는 나를 응원하고 나의 환경과 조건에 맞서자고.

그게 내 힘으로 만든 내 진짜 자존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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