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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꽃지 Oct 11. 2022

날카로운 첫 등산의 교훈

멧돼지 밥 될 뻔


장령산 치유의 숲 데크길


장령산. 

서울에 살 때는 들어보지도 못한 산이었다. 지난 주말에 가족들과 옥천묵밥집에 갔다가 어쩌다 들리게 된 곳이었다. 계곡을 둘러싸고 있는 ㅁ자 형태의 데크를 산책하며 경치를 조망하게 하는 '치유의 길'의 너무 매력적이어서, 다짐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꼭 혼자 와야지!'

산을 완주한 경험이 없는, 가본 산이라고는 동네 뒷산 밖에 없는 나로서는 아주 큰 도전이었다.


오늘이 그날!

이런 날을 위해 내가 준비해 둔 게 있지~. 장롱을 확 열어 재끼고 10년째 텍도 때지 않고 구탱이에 걸려만 있던 고어텍스 등산복을 드디어 개봉~~~~~하였으나,

'흠, 완벽하게 올드하군. 이거 입은 뒷모습은 완벽한 10년째 산악인 아줌마겠어.

그냥 레깅스나 입을까? No way! 나에게 복장은 하나의 의식 같은 것! 그래도 생전 처음 가는 등산인데 경건하게 의관을 갖춰야지. 일단 입자.'

지팡이도 챙기고, 내 약해빠진 무릎이 흔들릴 수 있으니 무릎보호대도 챙기고, 회사에서 인테리어 공사 현장 직원을 위한 안전장비 구비용으로 결제를 받아 하나 챙겨놓은 고급 등산화를 착장하고 나니 흡족하게 완벽했다. 오호~ 출발!


엄지 척!

50분 차를 몰고 와서, 등산로 입구까지 데크로 걸을 때까지는 우와~우와 감탄사가 끊이지 않게 엄지 척이었다. 높고 푸른 하늘, 화창한 햇살, 뭉글뭉글하게 울창한 숲, 거기에 폭도 깊이도 재단한 듯 딱 맞춘 계곡!

'이 치유의 길은 가을 단풍놀이 코스로 정말 정말 최고야. 강원도 산과는 다른 중부 내륙지방만의 맛이 단번에 보이는 곳이랄까. 이곳을 섭렵해야겠어. 모든 등산로를 다 가볼 거야. 단풍 들면 또 와야지~'



뭔가 잘 풀릴 때는 의심해야 한다. 특히 내가 너무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는 어김없이 불길한 징조이다. 

입구에서 받은 지도를 차에서 내리며 대충 보고 사진 한 장 찍어 두고 던져버렸던 나. 


데크에서 등산로로 접어들며 이 코스가 무슨 코스이며 몇 키로인지, 이런 정보를 하나도 확인 안 한 나.


산에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음에도 [라 바 055~~ 어쩌고] 관리번호 표지판이 있으니 이 길이 맞겠지 하며 추호의 의심도 없이 당당히 걸어간 나.  


길은 겁나게 가팔랐다. 

심장에서 컥컥 소리가 나는 거 같았다. '아~ 저기에 계단이 있다. 조금만 참자'하고 가보면, 계단이 계단이.... 내가 다니던 연세대학교 옆 안산의 계단과는 폭과 높이가 차원이 다른, 단지 모양만 계단이었다. 

'아~ 죽겠네. 지팡이 집고 가다가 작년에 겨우 고쳐놓은 오십견이 도지겠어.'


허거덩!

이것은 클라이밍인가? 

길이 없어지고 바위만 덩그러니. 

난 어릴 때부터 잘 넘어지기로 소문난 아이였다. 고로 이런 거 못한다고~~. ㅜㅜ

진짜로 기저귀 찬 아이가 사활을 걸며 소파를 오르듯 바위에 딱 붙어서 고어텍스를 긁어가며 겨우 올랐다. 


'나 집에 돌아갈 수 있겠지? 정상 가까이 온건가?

지도에서 올라가는 길보다 내려가는 길이 더 길었으니 하산할 때는 완만하게 갈 수 있겠지? 다시 내려가기도 무섭고 더 올라가기도 겁나고.

근데 여긴 어딘가?

119에 전화하면 헬기를 보내줄까? 멀쩡하게 헬기를 부를 수는 없으니 저기쯤 내려가서 조난당한 척을 할까?

남편이 산책로만 걷고 산에는 가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안 돌아오면 찾으러 오겠지? 울 남편 오늘 야근하는데..' 

온갖 잡생각이 주파수를 왔다리갔다리하며 지릭지릭 뇌를 울려댔다.

'아! 시끄러운 좌뇌는 꺼! 우뇌와 소뇌만 가동해 움직임에만 집중해라! 이 나이에 넘어지면 개고생이다.'


드디어 정,, 정상인가!

맑은 하늘이 빼꼼히 보이며 뭔가 정상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뭐지! 이 앙증맞은 흙바닥은! 원래 정상에는 나무가 내려다 보여야 하지 않나? 비석 같은 게 있어서 포토라인을 제공해줘야 하지.... 않나..... 아니구나 정상 ㅜㅜ '


그때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렸다. 

60대쯤으로 보이는 세 분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시며 라면을 드시고 계신 게 아닌가.  


"안녕하세요, 이쪽으로 올라가면 정상인가요?"


"정상이긴 한데, 지금 혼자 오는 거요?"


"네."


"여기 와본 적은 있고?"


"아니요, 길이 험한가요?"  


처음 오는 산을 혼자서 오르는 여자가 꽤나 이상하게 보였는지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신다.


"여기 혼자 온 거 누가 알아요?"


"남편이요."


"아이고, 아래에 데크가 생기고 나서 이 길은 사람들이 거의 안 다닌다고. 옆에 1코스로 많이 가지. 지도는 안 봤나. 우리야 선수들이니까 아는 길로 다니는 거고, 여기 이 흔적들이 다 멧돼지가 쓸고 간 자국이야. 선수도 이런 데는 혼자서 안 와. 여럿이 있으면 안 나타나도 혼자 있으면 멧돼지가 그냥 공격해. 난 또 죽을라고 뛰어내리러 가나 했네. 놀랐다고."


"놰에에?" ㄷㄷㄷ


"근데 남편이 이런 데를 와이프 혼자서 가라고 했어?"

"제... 제가 남편 말을 안 들어요. ㅜㅜ"


"왜?? 거참, 우리 말은 듣고 더 올라가지 마요. 여기서 내려가. 혼자 쓰러져 있어도 아무도 몰라"


"근데요, 저한테 지금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가라고 하시면 너무 무서워요. 저 이런 산 처음이에요"


"뭐라고? 처음 등산하면서 혼자서 온 거야?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먼. 겁은 없네. 이리 와서 라면 같이 할래요?"


"저, 그러면 국물만 조금 가능할까요? 저한테는 맛있는 초콜릿이 있는데요. 산에는 자주 다니시나 봐요."

 -이하 생략-



번죽을 밑천 삼아 이 분들 옆에 딱 붙어서 살아서 내려왔다.

내려오면서도 한참을 잔소리를 들었다. 그분들은 62세 동창들이고, 산에 다닌지는 20년이 됐으며, 보통 이렇게 천천히 내려가지 않는데 나를 위해서 속도를 맞춰주는 거라며, 지팡이 높낮이 조절도 할 줄 모르면서 등산화는 제대로 된 거 신었네, 장비는 왜 이렇게 좋은 거냐, 등산부터 안 가고 등산 샵부터 갔네, 산은 경험자에게 배워야 한다. 혼자서 하는 운동이 아니다........ 급기야


"이 동네에 살면 우리 산악회랑 같이 다닐래?"


허거덩, 내 번죽이 다소 과했나 보다.

"음, 음, 남편한테 한번 물어볼게요."


"아까는 남편 말 안 듣는다며?"


".......... 아니, 이제부터 들어볼까 하고요...."





그래 남편 말을 듣고 살자, 마저 엄마도 혼자서 산에 올라가지 말라고 했지.


날카로운 첫 등산의 교훈이다. 


남편 말 좀 듣자. 도전은 이런 데 하는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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