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모든 가슴 두근거리는 일들은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불현듯 찾아왔다
로스팅사부와 낚시를 가기로 했다. 항상 사부가 커피를 내려왔으나 이번에는 로스팅한 커피를 내려오란다. 그러지 않아도 Round3가 끝나거나 로스팅기술이 일정 수준에 오르면 종류별로 품평을 받으려 했는데 시기가 일찍 왔다.
돌이켜보면 인생의 모든 가슴 두근거리는 일들은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불현듯 찾아왔다. 모든 시험은 공부를 끝내지 못했을 때 치러졌고, 열애는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기도 전에 결혼했다. 아이들은 너무 빨리 자라, 눈 깜짝할 새에 졸업하고, 취업했고 분가했다. 걷는 것도, 말하는 것도 더디다는 손녀는 2돌도 되기 전에 뛰고, 말을 많이 한다. 어리광 부리는 시간이 후딱 지나갈까 두렵다.
어떤 커피를 볶을까? 사부가 갖고 있지 않은 생두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니 Guatemala El socorro marsellesa washed(micro lot grade)와 Ethiopia yirgacheffe G1 aricha wubanchi washed 두 가지는 없을듯했다. 두 가지 생두를 200그램씩 로스팅해서 숙제검사 샘플을 만들기로 했다.
yirgacheffe는 오버히팅만 시키지 않으면 덜 익어도 그런대로 커피맛이 나오는 품종이고, marsellesa는 접해보지 않은 커피지만 명색이 micro lot grade니 적당히 볶아내면 그리 흉하지는 않아 낙제점은 피할 수 있으리란 생각도 들었다.
마실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사부의 로스팅기술은 엄청나다. 모든 커피가 농익은 듯 매끄럽고 풍부한 맛과 향을 지니고 있었다. 로스팅 열이 생두 내부에 골고루 스며들었을 때만 표현되는 맛이다. 로스팅도 그렇지만 웬만한 바리스터 뺨치게 커피를 잘 내린다.
사부가 내린 커피는 모두 충분히 익은 맛이었으므로 평소에 로스팅하는 것보다 조금 더 익히기로 했다. 물론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해 신경 써서 로스팅하는 것도 있지만 이른바 고객 입맛 맞춤형 로스팅이다.
직전에 볶은 aricha wubanchi washed와 marsellesa washed는 240˚C에서도 충분하게 로스팅되지 않았기에 245˚C로 온도를 높여 로스팅했다. 1차 Popping이 충분히 일어났고 색상도 좋았다. aricha wubanchi는 10분 후 배출, 무게를 측정하니 170그램이 되었다. marsellesa는 13분 50초 후 배출하여 170그램을 얻었다. 모두 15%가 감량되었으니 충분히 볶아졌다고 판단된다.
로스팅 후 보통 상온에서 3일 숙성시킨 후 냉동보관한다. 1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aricha wubanchi에서 참기름냄새처럼 고소한 향이 올라오는 것이 신기하다. marsellesa에서는 숙성 3일 차에 참기름 냄새가 났다. 느낌상으로는 aricha wubanchi를 잘 볶은 것 같다.
두 가지 원두를 사부시음용으로 100그램씩 포장했다. marsellesa washed 70그램은 커피를 진하게 내려 보온병에 담았다. 사부는 에스프레소에 가까울 정도의 농도로 커피를 마시고, 나는 연하게 마시니 마시기 전 농도를 조절하면 된다.
숙제검사용으로 로스팅한 marsellesa washed는 맛은 고급스럽게 균형 잡히고 나무랄 것 없는 맛이다. 향, 산미, 단맛, 산도가 좋고 바디감은 높지 않다. Ethiopia yirgacheffe를 커피의 귀부인이라 한다는데, marsellesa washed를 표현하자면 흠잡을 곳 없는 젠틀맨이다. 검은 슈트에 머리에는 기름을 발라 단정히 넘겼고 스트라이프 타이가 어울리는 매너 좋은 신사다. 비집고 들어가 단점을 들춰내려 해도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개인적 취향이겠지만 단점도 있다. 완벽한 균형감을 역설적으로 이야기하면 어느 하나 강한 인상을 주는 포인트를 찾기 어려워 재미없는 맛이기도 하다. 단정하고 매너는 좋지만 싫증 나서 오래 사귀면 사귈수록 재미없어 가끔만 만나게 되는 사람 같다. marsellesa washed에게는 미안하다. 초보가 잘 볶아내지도 못했으면서 매력 없다 하고 있으니..., 하지만 다음에 구입할 생두 중의 하나다.
오늘 제목이 로스팅 숙제검사’이니 검사 결과가 중요하다. 1차 평가는 무사히 통과했다. 같이 낚시하는 동료에게는 누가 볶았는지 알려주지 않고 커피를 건넸다. 동료는 ‘역시 사부님 커피는 항상 맛있어’했으니 적어도 흉하게 볶지는 않았다는 증거다. 사부 역시 ‘홈 로스팅에서 이 정도 볶았으면 잘한 거다. 초보답지 않게 맛이 좋습니다’라고 평가했으니 낙제점은 넘겼다.
사부는 더 맛있게 생두 볶는 팁을 알려줬다. ‘로스팅 끝난 후 원두를 바로 배출하지 말고 로스터에 남아있는 열기를 원두로 되돌려줘라.’ 나는 느끼지 못했으나 사부의 입에는 뭔가 부족한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사부가 선물한 두 개의 드리퍼(Dripper)를 받아왔다. 칼리타 타입(kalita Type)과 하리오 타입(Hario Type)으로 드리퍼 종류에 따라 커피 맛이 다르다고 한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일체형 Chemex Classic Server & Dripper와 Copper & Titanium 드리퍼와의 맛 차이도 궁금하다. 역시 세상은 넓고 배움에는 끝이 없다.
주의 및 경고 1: 커피에 대해 일자무식인 생초보가 좌충우돌하며 로스팅하는 이야기이므로 따라 하면 무조건 실패한다.
주의 및 경고 2: 로스팅은 생각보다 번거롭고 시간이 소요된다. 취미를 붙이지 못할 때는 로스팅된 원두를 구입하는 것이 맛있고 저렴하다.
주의 및 경고 3: 앞으로 계속되는 커피이야기는 전문적이지 못하므로 커피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전문서적 구입 또는 전문 학원을 다니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