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노란 봉투에 담긴 영화

한 사람의 빛

by 운조



아무도 조명을 비추지 않았던, 그러나 사라지지 않은 한 사람의 빛.

노란 봉투 속엔, 그가 끝내 살아내려 했던 영화가 들어 있었다.



그는 한때,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

세상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는 렌즈를 들고, 그 풍경을 온전히 담아내고 싶었다.

한국에서 영화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엔 광고 제작사에서 조연출로 일하며 밤마다 단편 시나리오를 썼다.

이름은 J. 그러나 인생은 영화처럼 짜이지 않았다.

시나리오 공모에서 번번이 탈락했고, 생활은 점점 궁색해졌다.

결국 그는 이혼했고,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는 누나가 LA 근교에 살고 있다는 사실 하나에 기대를 걸었다.

그녀는 이민자 출신 간호사였고, 시민권자였으며, 두 아이의 엄마였다.

“당분간 애들 데리고 들어와. 자리 잡힐 때까지만.”

그녀의 말 한마디가 그의 선택을 밀어주었다.

하지만 정작 도착해보니, 누나 역시 버티고 있는 삶이었다.

아이 둘을 키우고, 병원 야간 근무를 버텨내는 생활 속에서

J와 조카들까지 돌보기에는 여력이 부족했다.


두 달 남짓 머물던 누나의 집을 나올 때,

그는 아이들의 신발을 조용히 벗겨 안았다.

그건 다짐이었다. 언젠가 나의 이야기로 이 땅을 다시 걸어들어가리라는.


그는 한식당 설거지부터 시작했다.

밤에는 중국집 배달을 뛰었고, 새벽에는 새벽배송 물류창고에서 물건을 날랐다.

가끔 마켓 게시판에 붙은 '웨딩 촬영 알바' 전단을 보고 결혼식 비디오 촬영을 하기도 했다.

렌즈를 들고 있지만, 더 이상 장면을 찍지는 않았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셔터를 눌렀다.


그렇게 두 계절쯤 흘렀을 때,

그는 교회 청년 모임에서 제시카를 만났다.

미국 시민권자인 그녀는 지역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며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그녀의 단정한 눈빛과 나직한 말투는 J에게 오래된 필름처럼 낯익고 따뜻했다.

두 사람은 금세 가까워졌고, 제시카는 J의 아이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당신 이야기를 누가 좀 찍어줬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슬프고, 조용하고, 아름답거든요. 언젠가 우리, 같이 써요. 당신의 이야기로.”


그녀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고, J는 영상 장비 대여점에서 일하게 되었다.

삶은 다시 작은 리듬을 되찾는 듯했다.

아이들은 웃었고, 주말엔 네 식구가 함께 산책을 나갔다.

그는 밤이면 글을 썼고, 그녀는 원고를 읽어주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는 결혼을 제안했다.


“난 지금도 충분히 행복해요.”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결혼을 하면, 당신이 나를 선택한 이유가 서류 때문이라고

의심하게 될 날이 올까 봐 두려워요.”


그 말은 무언의 이별이었다.

그 후, 함께 찍던 사진이 줄었고, 아이들과의 대화도 점점 줄어들었다.

조용한 밤, 제시카는 노란 봉투 하나를 식탁 위에 두고 떠났다.

봉투 안에는 그가 쓰던 단편 시나리오가 고이 접혀 있었고,

메모 한 장이 함께 들어 있었다.


“당신은 투명한 존재가 아니에요.

당신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닿아야 해요.”


그는 다시 노트북을 폈다.

세탁소에서 다림질하며 떠오른 장면,

빨래가 돌아가는 소리 속에서 문득 떠오른 대사,

아이들이 잠든 새벽, 식탁 위에 놓인 노트북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글을 쓸 때만큼은 그는 다시 영화감독이었다.


누나와는 언젠가부터 연락이 끊겼다.

서로가 서로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멀어졌다.

그는 가끔 누나의 근무 병원 이름을 검색해보다가,

브라우저를 닫고 조용히 시나리오 창을 다시 열었다.


몇 해 뒤, 나는 LA 한인타운의 작은 독립영화 상영회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초청작 중 한 편, 다큐멘터리의 엔딩 크레딧에 그의 이름이 조연출로 올라 있었다.

그는 상영 후 조용히 내게 다가와 물었다.


“혹시… 언젠가 내 이야기 써줄 수 있어요?

이렇게 살다 사라지는 사람들, 누군가는 기억해줘야 하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오늘, 이 글을 꺼낸다.

끝내 감독의 이름으로 호명되지는 못했지만,

삶의 모든 장면을 끝까지 응시하며 살아낸 한 사람의 이야기.

아무도 조명을 비추지 않았던, 그러나 사라지지 않은 그 빛을 위해.







“이 이야기는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은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한 것으로, 특정 인물이나 사실을 단정하지 않습니다.”



월요일 연재